“남자 교사 만나면 항상 돈 쓰는 거에 되게 쪼잔하더라고요.”
“맞아요. 월급이 적어서 그런지 뭐 할 때마다 돈 아끼려는 게 보여서 싫어요.”
“에이. 여기 영관 쌤도 계신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민망함에 괜찮은 척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교사가 되고 싶어 모인 임용고시생들의 스터디에서였다. 스터디 마지막날 뒤풀이에 참석했는데 5명 중 나 혼자 남자였다. 여자 넷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나니 대화 주제가 자연스레 ‘남자 얘기’로 옮겨갔는데. 남자 얘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전남친’을 떠올리게 되고 전 남자친구 얘기를 하다보면 결국 모든 남자들은 쓰레기들이라는 비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듣기 민망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2차까지 따라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 유일한 남자인 내가 집에 가면 다들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당장 집으로 가라고 화내는 룸메이트로 인해 신경도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막차시간이 가까워졌을 즈음 먼저 일어나 봐야 될 것 같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스터디 때마다 눈치를 보게 됐다. 나에 대해서도 그런 험담을 주고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떨쳐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스터디를 함께 하는 선생님과 강의실에서 눈이 마주쳐 인사하는데 시선을 피한다거나. 혹은 다가가 밝게 인사해도 뭔가 덜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는 듯한 느낌이 반복되면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하고 내 생활을 돌아보았다. “혹시 최근에 제가 뭐 실례한 거 있을까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숨이 막힌다. 그러다보니 스터디원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마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결국 나는 스터디로부터 자연스레 멀어졌다. 술자리에서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나였는데. 괜히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공 수업 첫 시간. 교수님과 ‘공감적 이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심리학에서, 특히 ‘상담이론’에서 공감은 너무나 중요한 개념이다. 4학기 내내 들은 개념이라 학문적인 이론들을 떠올리며 그럴듯하게 답변을 생각하는데. 교수님이 질문을 바꿨다. “그러면 공중전화로 아무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젊은 여자가 받으면 신음 소리를 내는 내담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것도 매일 그런 행위를 반복한다고 하면 이 내담자를 어떻게 공감해 줄 건가요?” 말문이 막힌다. 강의실에 있는 남자는 32명 중 2명뿐이었다. 분명 공감적 이해를 배우고 있으니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정답인 걸 알았지만. 공감할 수 있다고 하면 변태 혹은 소시오패스로 소문이 날 것 같았다. 모두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교수님은 “저라면 주먹부터 나갈 것 같아요. 왠지 맞으면 좀 고쳐질 것 같은데?”라고 농담을 던졌다. 내 앞뒤와 양옆으로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긴장이 조금 풀어지면서. 저분은 참 좋은 교수님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교수님은 상대의 감정, 행위, 현상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상담자로서의 공감이라고 했다. 그것을 그는 ‘비소유적 공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결국 “그래그래. 나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식으로 상대의 생각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둔 방관자와 같은 상태로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야만 상담적 개입이 가능하다면서 말이다.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개입에 반드시 뒤따르는 상담자로서의 책임감이 두려워졌다.
몇 달 전 지인으로부터 남자 소개를 부탁 받은 적이 있다. 사진을 보내줘도 욕먹지 않은 친구 2명이 생각났지만. 한 명은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여자와 섹스하는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31살 백수였다. 걔네 말고 소개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데. 전부 직장이 아직 없거나 고시 준비 중이라서 한숨 밖에 안 나왔다. 다음날 생각해 보니 고민하던 내 모습이 상대 입장에서는 소개해 주기 싫어 우물쭈물하는 모습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까 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왜 이렇게 서툰 걸까.’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에 결국 소개를 부탁한 지인과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내 주변 남자들 중 여자들이 괜찮게 생각할 정도의 외모와 직업(대기업, 전문직, 공무원 등)을 ‘동시에’ 만족하는 녀석들은 기혼자거나. 2년 넘게 만난 여자친구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섹스해 본 이성의 수가 20~30명을 가뿐히 넘는 놈들 뿐이다.
인스타그램에 커플 사진이 사라지면 며칠 안에 수많은 여자들의 연락을 받곤 했던 친구가 있는데. 얘는 술만 마시면 35살까지 즐기다가 10살 연하랑 결혼할 거라는 얘기를 농담 섞어 말하곤 했다. 하지만 30살이 되자마자 3년 동안 사귀었다 헤어지길 두세 번 반복했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물론 지금 아내 분과 다정하게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친한 군대 선임들 중 한 명은 퇴근하고 헬스장에 출근하는 성실한 생활을 몇년째 이어오고 있으나, 틴더나 골드스푼 같은 이성만남 어플을 4~5개씩 동시에 돌리면서 수십명의 여자들과 동시에 연락을 주고 받는 성스러운(?) 생활 또한 이어가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교육봉사 동아리 동기 한 명은 일주일 전 오랜 시험 준비 끝에 충청도 공주시 소속 공무원이 되었다. 연애를 4년 동안 쉬었으니 이제 진짜 공주님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지.
사랑이라는 건 뭘까. 나는 네가 좋아. 나도 네가 좋아. 하며 연애를 하거나 친구가 되기에는 나이가 많아져버렸다. 교생실습에서 만난 친구 한 명이 인물도 성격도 괜찮아서 혹시 소개해 줄 여자 없냐고 룸메이트에게 물었는데. “그러면 학생인 거잖아. 절대 안 되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교생실습 기간 4주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그 친구는, 내 룸메이트 회사 근처 대학교의 사범대생이었다. 나이는 20대 중반이었지만 어른스러웠고 성격도 모나지 않고 유쾌했다. 함께 일하면서 좋은 동료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참 든든했다. 예비 교사로서 책임감도 있어보여 임용고시도 분명 빠르게 합격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내게는 진국인 이 남자가 직업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성을 만날 기회마저 얻기 힘든 것은 잘못된 거 아닌가?!? 하지만 이성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전해도 “아직 선생님이 된 것도 아니잖아. 소개해 주기는 조금 부담스럽지.”라며 에둘러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주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을 낼수록 이상한 사람이 된다. 어렸을 때는 착하다는 말이 칭찬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착하다’가 욕처럼 느껴진다. 멍청하다. 지질하다. 소심하다. 호구다. 뭐 이런 느낌으로? 물론 나는 넷 다 해당돼서 인생 참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오빠는 내가 있잖아.”
오해받은 것 같은 하루에 우울해하며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자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들로부터 오해 받는 삶은 참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해 받는 하루는 참 행복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