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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관 Oct 17. 2022

가난 팔아 경험 쌓기

 “포기해.”

 영어 공부가 하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엄마의 대답이었다.     


 우연히 영어 공부 서비스를 알게 되었다. 강의기간은 무려 3년. 첫 1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일정량의 학습을 하면 1년 뒤에 강의료를 100% 환급해 주는 패키지였다. 목표 달성에 대한 보상으로 상금까지 준다고 적혀있어서 공부를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는 기회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격은 89만 원 정도. 매일 공부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배운 문장을 몇 줄 적는 미션이 있기는 했지만.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간단했다. 무엇보다도 위 베어 베어스 만화의 곰 세 마리가 너무 귀여웠다. 그리즐리, 판다, 그리고 아이스 베어. 이들과 함께라면 정말로 영어를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곧장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영어 공부하게 해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몇 초간의 침묵. 돌아온 대답은 “포기해”였다. 꼭 미션 성공해서 강의료 전부 돌려받겠다고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니? 그런 건 좀 포기해 아들.”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람은 누구나 자본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이 좋은 양육자일 수도 있고 돈만 많은 부모일 수도 있고. 매력적인 외모일 수도 있다. 그렇게 저마다 출발점이 다르다. 누군가는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해외여행을 간다. 동기 한 명은 지금도 해외 대학원 유학을 준비 중이다.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팔아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너도나도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하는 세상에서 매력은 분명 큰 자본이 된다. 누군가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방학 두 달 내내 강남역으로 토익학원에 다녔다. 학원이 끝나면 근처 펍에 가서 스터디원들과 생맥주를 마셨다. 학원도 안 다니면서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또 다른 누군가는 친구가 사주는 생맥주를 얻어마셨다. 그리고 너무 맛있다면서 염치 없이 한 잔 더 주문했다. 그게 바로 나였다.     


 대학생활이라도 좀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서울에서 알바에 찌들어 살고 싶어도 19살을 받아주는 알바는 찾기가 힘들었다. 모두가 기피하거나 몸이 힘든 알바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가난마저 팔기로 했다. 내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 가난뿐이었으니까. 나는 가난을 무기 삼아 1학년 때부터 적극적으로 휘둘렀다. 일명 ‘가난 팔이’ 작전이었다.


 법원에서 날라온 부모님의 개인회생 통보문. 부모님이 최저생계비로 몇 년째 생활하고 있음을 증빙하는 서류는 19살 대학생의 가난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대외활동을 지원할 때나 장학금을 신청할 때. 혹은 공모전에 접수할 때에도. 극적인 나의 가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수식어가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삶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19살 대학생. 비슷비슷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졸업을 했고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사실은 나를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경쟁률이 높은 대외활동에 합격하거나 공모전에서 상을 받으면. 그것이 또 하나의 경력이 되어 다른 활동에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취업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대외활동은 나한테 단지 ‘꿀알바’ 혹은 ‘놀이’였다. 시급 몇배에 해당되는 활동비를 받으며 멋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 그게 전부였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대외활동을 4~5개씩 병행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지 못하게끔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열정’이라고 포장했다. 스무 살에 이미 대외활동 12관왕을 이룬 나를 보고 후배들은 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정에 늘 목말라있었던 것 같다. 외로워서.


 시급으로 100만 원을 주는 아르바이트에 합격해 활동한 적이 있다. ‘청춘아’라는 대외활동이었는데. ‘알바비 500만 원이 왜 필요한지’ 사연을 쓰는 것이 1차 미션이었다. 물론 공개 미션이라서 나는 다른 지원자들의 사연을 볼 수 있었다. 나는 3천여 개의 사연들을 거의 다 읽어보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여기 다 모인 걸까.’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슬프고 아픈 이야기들뿐이었다. 시급 100만 원 앞에서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저마다의 가난과 불행을 최선을 다해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보이스피싱으로 사기당한 부모님 사연을 팔고 또 누군가는 가족의 장애 혹은 죽음까지 팔고 있었다. 마치 누가 제일 불행한지 겨루는 ‘천하제일 불행 토너먼트’에 참가한 기분. 부모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가족들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는 명함조차 못 내밀 정도였다. 더 읽다가는 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아 사연 읽는 것을 멈췄다. 사연 접수 마감 하루 전. 나는 음주운전 트럭에 치여 교통사고로 죽은 누나 이야기를 쓰다 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생존전략이 있다. 부모님의 돈으로 도전을 하거나. 낯선 나라로 유학 가거나. 혹은 원하는 시험을 몇 년 동안 준비하는 것. 나는 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억울하지 않기로 했다. 저들의 삶은 내가 부모님의 가난을 팔아 경험을 쌓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저들이 비겁한 게 아니라면 나 또한 비겁한 게 아니라고. 스무 살의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가장 아름다울 나이에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꿈과 삶을 포기하지 못해 살아남을 생각만 했던 스무 살의 내가, 조금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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