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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관 Oct 15. 2022

조기졸업을 포기하는 3가지 이유

 대학원 수업 시간이었다. ‘상담실습 및 사례연구’라는 과목이었는데. 몇 주에 한 번씩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상담 실습을 했다. 요즘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을 묻는 상대방의 질문에. 내담자 역할인 나는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본다. 친한 사이에서도 그렇지 않은 사이에서도 진짜 힘든 얘기는 꺼내기 힘든 법이다.


 “음. 저는 이번 학기에 원래 조기졸업할 예정이었잖아요. 그런데 이번 졸업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게 아쉬워요.” 상담자는 이유를 묻는다.

 “일단 졸업 논문 쓰는데 업체에 통계 돌리는 거 요청해야 돼서 200만 원 정도 들더라고요. 안 그래도 논문 쓰는 게 부담스럽고 싫었는데. 돈까지 그렇게 든다고 하니까 조기졸업하고 싶지가 않아졌어요.”

 “그런데 쌤. 조삼모사라는 말 알고 있죠?”

 상대방의 물음에 나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사실 조기졸업하면 한 학기 등록금 600만 원을 아끼는 셈이다. 논문 작성에 드는 돈 200을 제외하더라도 400만 원을 버는 셈인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사실 석사논문 완성과 임용고시 합격을 동시에 해낼 자신이 없어서 도망치는 걸 말이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지 못한 채 자꾸 다른 핑계를 댄다. “교육대학원 행정실 조교로 일하면서 받는 장학금이 한 학기 480만 원이거든요. 졸업하면 당장 내년 1월부터 일자리를 다시 찾아야 될 텐데. 요즘 괜찮은 돈벌이 찾는 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꿀알바도 찾기 힘들고.. 그렇다고 임용고시 준비할 돈 벌자고 인턴을 하거나 아무 회사 취직하기에는 회사 생활 적응하느라 공부 집중 못 할 것 같아요. 어쨌거나 지금 일하는 행정실에서 팀장님과 차장님들한테 인정받으면서 보람감 느끼며 일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내년 1학기까지 일하면서 장학금으로 생활비 마련해보려고 해요.”   

   

 상담 실습 후, 상호 피드백 시간. 상대방은 내가 감정 표현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기분이나 느낌에 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시간과 판단의 순서대로 일련의 정보와 사건들을 서술해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방어기제의 한 종류인 ‘주지화’가 생각이 났다. 주지화는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 채. 이성적인 판단과 지적인 분석만을 가지고 상황에 대처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를 말한다. 나는 여전히 감정이나 느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20대 후반이 되었을 즈음. 돈 때문에 급히 계약직 인턴으로 취직한 중소기업에서 인간관계에 잘못 휘말린 적이 있다. 인턴 평가를 통해 일부는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회사였는데. 함께 들어온 인턴이 정규직 전환에는 관심도 없는 나를 자꾸 견제하고 따돌리려는 느낌을 받았다. 회식 자리에서, “여기 서울에서 대학 나온 사람 영관 씨 밖에 없잖아요.”라고 말하며 웃는 그의 표정이 왠지 조롱같이 느껴졌다. 시간 갈수록 자신감을 잃고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중도에 퇴사하면 경력에 흠이 가거나 취업할 때 혹시 문제 생기는 것은 아닌지.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됐다. 결국 퇴근길마다 몇 번 더 출근해야 퇴사하는 날이 되는지 세며 몇 달을 더 버텼다. 인턴이 끝난 직후 대학교로 돌아왔지만. 사람 많은 자리를 피하게 됐다. 만남은 단둘이 보는 게 가장 좋았고 만남보다는 혼자가 편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대학교 행정실에서 일하면서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부원장님은 무슨 문제든 해결해내는 나를 보고 ‘슈퍼맨’이라고 불러주었고 팀장님과 차장님들은 나의 사소한 업무 처리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하는 곳에서 사람이 좋은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그것이 내가 조기졸업을 포기하고 학교에 한 학기 더 머물고 싶은 또 한 가지 이유다. 상처가 된 기억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며.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작은 성취를 해내는 일상은 내게 용기를 주고 힘든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니까.     


 새벽 6시에 일어나 흰밥과 깍두기, 그리고 조미김을 먹었다. 햇반에 김 한 숟가락, 깍두기 한 숟가락, 김 한 숟가락과 다시 깍두기 한 숟가락. 두 가지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유튜브에서 ‘스타벅스 매장음악’을 검색해서 틀어놓았다. 제주도에 별장을 한 채 지어놓고, 한 달 동안 혼자 글을 쓰는 상상을 했다. 조기졸업과 맞바꾼 이 순간. 임용고시 공부 대신 글을 쓰는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내년에 꼭 책을 내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줘야지.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친구가 될게.” 이런 말을 하며 책을 건넨 뒤. 최선을 다해 임용고시에 합격해야지. 깍두기 국물을 마시면서, 좋은 상담선생님이 되리라는 다짐을 한다.     


 “오늘도 멋진 하루 만들어 나가야지. 밤이 되면 행복한 기분으로 잠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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