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
J. 공주님이라 부르던 네게.
뚜-뚜- 공주님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착했습니다.
공주님 안녕. 편지라는 것을 써보려다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어서, 유튜브에 ‘편지 쓰는 법’을 검색해봤어. 작가가 되겠다던 사람이 편지 쓸 방법을 몰라 이러고 있다니. 참 우스운 일이지. 아마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만큼은 잘 쓰고 싶고 잘 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그래서 더 편지 쓰는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인 것 같아. ‘좋은 연애편지’는 내게 ‘유령’과 동의어일 거야. 존재할 것 같긴 한데 만날 수는 없겠지. 좋은 글을 써서 ‘보여주겠다’는 목표가 실패할 것 같아 두렵거든. 실패할 게 뻔해보여서 아예 안 해버리겠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박혀있나봐.
그래도 나 칭찬해줄래? 이렇게 연필을 들고 있어. 연필은 글씨를 지울 수 있으니까. 틀린 문장을 펜보다 쉽게 고칠 수 있어 좋아. 부담이 훨씬 덜 되거든. ‘일단 한 문장만 써보자. 이상하면 어때 지워버리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하니 벌써 편지지의 절반 정도 글을 썼어.
나는 방금 전 ‘편지 쓰는 법’에 관한 영상을 하나 봤어. 영상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 주의사항으로 편지를 길게 쓰면 안 된대. 흠. 시작부터 마음에 들었어. 딱 39초 봤을 뿐인데. 나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잖아. 누군지 몰라도 정말 대단한 유튜버인 것 같아. 글이 너무 길면 오히려 받는 사람이 편지를 한 번 읽고 끝내게 된다나? 편지 내용이 많으면 나중에 다시 읽기가 곤란해질 거래. 나중에 다시 한 번 펼쳐보는 게 손편지의 매력인데 말이야.
생각해보니 올 한 해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올해 특히 힘든 일이 많았는데, J 당신은 나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는 걸 알기에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고생했다고 애썼다고 말해버리면 그 수고가, 그 고생이, 별 거 아닌 일이 돼버릴 것만 같아 차마 고생 많았다는 말을 못하겠더라. 그래도 우리가 함께 있어 나는 정말 행복했어. 기뻤고. 힘든 순간에도 당신은 늘 곁에서 응원해줬고, 그래서 난 힘 내서 이겨낼 수 있었어.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솔직히 내년의 내가 올해의 나보다 힘든 일을 더 많이 겪을 것만 같아 두려운 마음이 커. 걱정도 많고. 그래도 우리 같이 잘 견뎌보자. 왠지 나한테는 이겨낸다는 표현보다 견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물론 J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정말 소중한 사람이니까. 내가 곁에서 늘 응원할 거니까. 그동안 나 때문에 많이 울고 힘들어했을 텐데. 앞으로 더 그럴 텐데. 그럼에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하루 빨리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 당신을 먹여살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결혼을 해달라고 칭얼거리는 날이 왔을 즈음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물론 그 행복은 당신이겠지. 아마 나는 엄청 떼 쓸 거고. 당신은 결국 내게 발목 잡혔다면서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는 날까지도 억울하다고 내게 쭝쭝대겠지. 결혼식 후, 신혼여행 첫날 밤에, 당신이 내게 “이 나쁜 놈아.”라고 말하며 내 가슴을 때리는 상상을 할 때가 많았어. 그러면 나는 J 당신을 침대 위로 집어 던진 뒤, 꼭 끌어안겠지. 낯선 침대 위의 공기는 두 사람의 기분을 더 설레게 할 거고. 방의 온도는 조금 더 따뜻해질 거야. 아마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 또 소설 쓰지 말라고 하겠지? 4년 뒤에 두고 봐. 적어도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게 될 테니까.
사랑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J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나를 좋아해줘서 정말 기쁘고 감사했어. 우리 내년에는 좋은 친구처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서로 믿고 의지했으면 좋겠다. 늘 감사해. 당신이라는 사람을 위해 늘 기도할게.
*
나는 오늘 친구로부터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2만원을 받았어. 대기업에 다니면서 벌써 1억을 모은 그에게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편지를 써주겠다고 했지. 괴로움에, 밤새 잠이 오지 않더라. 아마 꿈 꾸면서 열등감을 느낀 것 같아. 편지를 써달라며 내게 2만원을 입금한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무시당하는 기분도 느꼈지만, 그만큼 내 글을 친구에게서 인정받은 거라고 좋게 생각해보기로 했어. 물론 그 인정이 딱 2만 원어치였지만 말이야. 필요 없는 생각이 많아져 잠이 오질 않더라. 어른으로 살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든지. 어른이 된다는 건 하고 싶은 일보다, 싫어도 해야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는 거라는 걸 너무 늦은 나이에 알게 된 것 같아.
그래서 나는 J 당신을 떠올리며 편지를 썼어. 누가 읽어도 자기한테 쓴 편지처럼 보이도록 보편적이면서도,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그저 관객일 뿐이고 당신이 주인공인 그런 글 말이야. 더 이상 내 글을 읽을 일 없을 거라던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여기에 올려. 당신이 정말 내 글을 읽지 않으면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일은 없겠지. 그래도, 연애하면서 편지 한 번 제대로 못 써줬는데, 이렇게라도 당신을 떠올리며 글쓰니 기쁘다. 힘들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나는 것 같아.
친구 녀석에게는 고맙다고 카톡이 왔어. 여자친구가 글을 읽고 감동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더라. 얼굴 모를 그녀는 절대 몰랐을 거야. 자신의 눈물이 남자친구가 시간 쓰는 게 아까워서 고작 돈 2만원 주고 산 상품이었다는 거. 편지지 3장 중 2장이, 내가 2만원 받고 대필해주다시피 고쳐준 글이라는 거. 그리고 덕분에 나는 치킨에 간장소스를 발라 먹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는 거 말이야.
누가 뭐래도 이 글의 주인공은 당신이라고. 언젠가 알려주고 싶었어. 아마 이 글이 책으로 나올 때까지 그 친구가 연애를 하고 있다면 두 사람을 위해 이 편지는 책에서 지워야겠지. (하지만 지울 필요가 없어져버렸어. 그 친구는 헤어졌고, 그 친구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 게 벌써 2년하고도 6개월 전이니까.)
부족한 내 곁에서 내 꿈을 응원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이번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함께 꾸미고, 따뜻한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자. 나는 당신이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 함께하는 삶이 행복하기를. 진심을 다해 기도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