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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Jul 02. 2020

뒤로 가고 싶은 날

에세이

 “그만하자.”

 “그래, 잘 지내.”

     

 또 하나의 탑이 무너져 내렸다.

 내겐 더 이상 무너진 탑을 도로 쌓을 힘이 없었다. 또다시 실패를 겪었다. H는 눈발을 맞으며 떠나갔다. 추운 겨울을 함께 통과해내던 우리는 겹겹이 쌓인 눈 속에 파묻혀 버렸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H도 나도 다신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다.

     

 H를 배려하지 못한 것, 그를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한 것, 그리고 우리의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것. 어떤 각도로 보아도 우리는 훌륭한 작품으로 남지 못했다. 어느 누구와도 차별될 만한 점이 없었고, 우리는 사랑을 하며 우리만의 결정체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나는 내 연애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패의 원인을 나에게서만 찾게 되었다.      


 A정류소에서 하차했다. 그곳에선 익숙한 내음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리저리 돌려댔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사람에 대한 가장 슬픈 기억법은 향기였다. 향기는 떠나간 모든 사람들을 아름답게 상기시켜준다. 반년이 지나고 H의 생각이 가물가물해져 갈 무렵, 그 향기는 나로 하여금 다시 H를 떠올리게 했다. 향기를 내뿜고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 20대의 남자였다. 남자는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남자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러 간 것이다. 나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류장에는 여전히 익숙한 향기가 맴돌았다. 그 순간 그를 잊어가기 위해 떠올렸던 좋지 못했던 순간들에 안개가 서렸다. 그 안개는 기억을 왜곡시키기까지 했다. 왜곡된 기억들은 정류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만큼이나 아름답게 펼쳐졌다.

 나는 이곳에서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실패를 겪고 힘든 시기를 겪는 순간마저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내 몸은 나를 거부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정류장으로 갔다. 그곳에선 더 이상 향기가 나지 않았고 코끝에 긴 잔향만이 은은하게 맴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부터 잠시 도망쳐 나왔다. 내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반대편에 서게 됐다. 사랑을 하며 실패는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랑을 찾아갔고 늘 똑같은 지점에서 정체되었다. 실패가 겹겹이 쌓여 가는데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도 처음 왔던 길로 되돌아가도 H는 내게서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날은 그랬다. 앞으로 가는 것보다 뒤로 가는 것이 더 위로가 되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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