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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Jun 15. 2020

동화역에서

1분 소설

  눈을 떠 보니 나는 동화역에 있었다. 자화와 함께.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채도와 명도가 높았다. 세상은 선명하고 밝아 보였다. 우리는 창문 너머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떨까?

  확신하지 못한 내 질문이 자화에게 닿으면

  -우리가 보는 그대로일 거야.

  자화는 자신감 넘치게 말해 주었다.     


  나는 자화와 바깥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여기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동화 같이 보였다. 나는 이곳을 나간다면 동화 속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우리는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동화역 밖으로 나갔다. 동화역 안에서 보는 바깥세상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데 역을 벗어난 순간부터 세상은 어둡고 흐려졌다. 자화는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세상과 나를 번갈아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내 눈에는 자화의 얼굴과 몸이 자꾸만 흐려져 간다.


  -자화야, 나는 그런 불안감이 들어. 내 눈에는 세상이 너무 어둡고 흐려져. 세상이 어둡고 흐려진 게 맞으면 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 거야. 그런데 세상은 선명한데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달라진 거라면 어쩌지.

  자화는 내 불안감에 동요되기라도 했는지 시선을 세상 속에 고정시켰다. 여전히 자화는 어두워지고 흐려져 가고 있었다. 자화는 나의 손을 이끌며 말했다.

그럼, 우리 다시 돌아가자.     


  자화는 나의 손을 잡고 다시 동화역으로 뛰어 들어왔다. 우리가 다시 들어온 순간 바깥세상은 다시, 선명하고 밝게 보였다. 자화도 다시 선명해졌다. 이곳에 평생을 머무르고 싶었다. 창문 너머에는 여전히 동화 같은 바깥세상이 보였지만 우리는 더 이상 창문 너머의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 속에, 자화는 자화 자신 속에 침잠해갔다. 나에겐 더 이상 바깥세상을 상상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세상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모든 게 바뀌었을지도 몰라.

  나는 자화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자화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우린 어디로 가?

  나는 바깥세상도 갈 수 없었고, 바깥세상에 발을 디딘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남을 수도 없었다. 나는 선택했다. 기차를 타기로.   

  

  -다음 역은 어딜까?

  나는 자화에게 물어왔다. 자화는 내 물음에 답해 주었다.

  -현실

  -같이 가자, 자화야. 둘이 가면 덜 무섭지 않을까?

  -그곳에 나는 갈 수 없을 거야. 넌 내가 없어도 내가 있을 때만큼 해내야 해.

  기차가 도착하자 자화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마치 오랫동안 볼 수 없을 것처럼.     

  -소슬아, 세상이 어둡고 흐려져 있으면 너는 세상을 보지 마. 세상은 선명한데 세상을 보는 네 눈이 달라졌다면 다시 나를 불러줘. 나는 동화역에 남아 있을게.


  나는 기차에 올라탔고, 눈을 떠보니 현실이었다. 자화는 없어지고 여섯 살 아들 석우에게 읽어주던 동화책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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