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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Mar 12. 2024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소제목으론 설명할 수 없어

용용,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용구야, 안녕!

우선 편지를 쓰기에 앞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나는 널 믿어. 설령 네가 너를 믿을 수 없다 해도.


스무 살 때 기억나?

동네에서 운동도 하고 편의점 앞에 앉아서 죽치고 얘기도 나눴잖아. 술도 못 먹는 애 둘이서 복숭아 맛 녹차 먹으면서 가정사 얘기하고. 작은 동네였지만 겁도 없이 열두 시까지 걷다가 들어간 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었어. 때때로 내가 너를 데려다주기도, 네가 나를 데려다주기도 하며.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도피처였던 것 같아.

 

때때로 집이 편하지 않을 때도 있잖아? 불편함은 참고 견디라고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야. 우린 그때 살기 위해 집을 나왔던 거였어. 나와서 걸었던 길이 우리가 아는 길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길을 잃을 위험이 없었잖아. 설령 잃는다 해도 돌아갈 거란 믿음이 있었던 곳이잖아.


초등학교 1학년 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도 여행처럼 느껴졌어. 그러다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게 되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시내에도 가고 말이야. 그때 너랑 찍은 사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어. 그땐 왜 안 찍냐고 다그치곤 했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내 욕심이었던 것 같아.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냥 너를 기다려 줄 것 같아.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혹시 예전과 비교해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 집에 놀러 와. 너랑 찍은 사진 앨범을 펼쳐줄게. 물론 예전에 넌 사진 안에 없을 거야.  대신 사진 속에서 누구보다 해맑게 웃고 있는 지금의 너를 보여줄게. 사진에 등장하지 않았던 네가 내 사진에 등장해 준 것 자체로도 사실 고마워. 그런데 더 고마운 건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너야. 웃는 모습이 꼭 구름 같아. 구름 안에는 숲이 있을 것 같거든. 네가 웃을 때 울창한 숲에 온 것 같아. 나를 숲으로 데려다 주어서 고마워.


지금은 자주 볼 수 없는 내 용구야, 너는 여전히 내 숲이야. 자주 가지 못하더라도 한 번 가면 오래 머물고 싶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설명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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