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케익을 냉장고에 넣었다. 상자가 흔들린 바람에 생크림이 벽을 타고 나아가고 있었으며 라즈베리 잼은 천장에도 묻어 있었다. 흡사 방탈출 게임 호러 편 배경을 보는 듯했다. 나는 이 케익을 내일 먹기로 결정했다. 큰 이유는 없다.
코로나가 시작됐을 때 졸업을 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싶은 일들이 그 시기에 한꺼번에 밀려왔다. 당시 오래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할머니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으며 친구들이 하나둘씩 멀어져 갔다. 할아버지랑 작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외에도 정리할 것들이 많이 생기고 있었다.
근데 좀 신기하기도 하다. 이상하니만큼 꿈이 많았던 때도 그때였다는 것이 말이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시기였는데 해보니 되겠다 싶었다. 그때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걸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장 좋아하는 교수님께서 나를 포함한 졸업생 세명에게 팀 프로젝트를 주셨고, 독서모임 여러 개(덜 읽고 나간 적 좀 있음.)와 소설모임, 시모임을 했다. 거기에 알바도, 할머니 케어도 소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몸이 한 개여도 여러 개인 척하며 살았다.
그래도 유일하게 숨통 트일 때는 글 쓸 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뿐이겠구나 싶었다. 근데 글마저도 안 써지는 날엔 내가 뭘 하고 있나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나름 노벨문학상이라는 미친 꿈(?)을 꾸며 뭐라도 써나갔다. 뭐라도 쓰는 게 안 쓰는 것보다 나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읽어보니 그 당시 글 쓴다고 말하고 다녔던 내가 부끄러워졌고, 노벨문학상ㅋㅋㅋㅋㅋ.)
여러모로 지금이 그때보다 낫다. 나만 케어하면 되고 친구 없는 삶(아예 없진 않음.)은 꽤 되어서 그럭저럭 견딜만하니까. 근데 글에 대한 절박함이 옛날에 비해 없다. 작가세포가 집을 나간 모양이다. 언제 돌아오려나.
직장에선 좀비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곱만 떼고 출근한다. 화장을 하고 가는 날이면 아이들이 신기해한다. 어디 가냐고 묻는다. 오늘 홧김에 그만둘까 생각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너무 좋아서 망설여진다. 동료들한테 나도 그런 존재일까?
나 잘하고 있나. 근데 잘해야 할 필요 있나. 그래도 하는 김에 잘했으면. 다른 일은 이만큼 해낼 수 있을까. 그만두면 무슨 일을 또 시작할까. 근데 거기 가면 또 새로 배워야 하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활보하는 까닭에 잠시 생각의 전원을 끄게 된다. 전원을 꺼도 완벽한 쉼은 아니다. 결국은 무기력상태(좀비)로 이것저것 다 하긴 해야 한다.
오늘 추석선물을 받아왔다.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라고 주는 선물일 거다. 내일 가면 미뤄놓은 일도 해야겠다. 어젠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엔 후회를 만들고 내일을 걱정하게끔 한다.
근데 과연 내일 난 케익을 먹고 싶긴할까?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긴 해. 아직 날씨가 쌀쌀하지 않으니. 오늘 먹고 싶어서 산 케익을 오늘 먹지 못하고 내일로 미루는 마음을 어제의 나는 알까. 예측조차 못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