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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May 28. 2020

<벌새>

독립영화 리뷰

  벡델 테스트를 만든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이 영화를 보고 남긴 평이다.   

  “이야기 없이 삶이 그대로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이, 플롯도 없이 말이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굉장히 섬세한 플롯을 눈치챘다. 그거야 말로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만든 바늘땀들을 사람들은 쉽게 보지 못할 거다.”

  벡델이 했던 말처럼 나 역시 영화를 처음 본 순간 놓친 부분들이 꽤 많았다. 담담하게 슬픔을 노래하는 영화,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 나오는 따뜻한 온기. 이 정도가 영화를 처음 본 나의 감상이었다.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되고 나서야 너무 섬세하게 감춰 두어서 알아보지 못했던 영화 속 장치들이 나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 부분들을 놓치지 말고 알아달라고 말이다.


  첫 번째로 엄마를 부르면서 불안해하는 은희의 모습. 영화가 시작될 무렵, 은희가 층수를 헷갈려 902호에서 엄마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층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을 자각하기 전 엄마를 부르는 은희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마치 자신이 버려질 것처럼. 또 다른 장면에서도 은희가 심리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엄마를 발견한 은희가 반가운 마음에 엄마를 힘껏 부르는 장면이었다. 하지만이 엄마는 은희가 목청껏 불러도 듣지 못한 채 가버린다. 두 장면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엄마. 이는 엄마도 부름을 못 들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엄마’라는 존재가 자신이 부르면 대답해 줄 것 같은 대상이자, 혹은 엄마도 한 개인으로써 고민이 있고 삶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을 시기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엄마도 자신의 부름에 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간다. 그리고 자신만의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사람임을 깨달아가게 된다.  


  두 번째는 정착하지 못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청소년기는 늘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그리고 빠르게 변화해간다. 이러한 모습을 잘 반영해주듯, ‘은희’도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찾아 머무르려 하지만 쉬이 되지 않는다. ‘지완’ 과의 사랑이 좌절되고, 후배 ‘유리’와의 사랑도 좌절된다. 또한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 주었던 선생님 또한 자신에게서 떠나가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선생님과 다시 볼 수 없는 앞으로의 은희는 슬픔에 빠져 있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성장해 갈 것이다. 불안정한 시기에는 자아조차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조차 명확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세 번째는 영화서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모습들을 부각해 주고 있었다.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은희에게 감자전과 비피더스를 먹으라고 한다. 하지만 오빠가 학원에서 돌아오면 밥상을 차려주라고 한다. 또한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아빠 역시 대훈의 회장 선거에 관심을 가지며, 용돈도 주겠다고 얘기한다. 그 자리에서 은희가 오빠에게 맞은 것을 말하지만, 폭력을 가한 오빠와 함께 은희마저 혼나게 된다. 또한 아빠는 대훈이 외고를 가기 위해서 가족 모두가 힘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들에서 아들이자, 우등생인 대훈에게만 기울고 있는 가족들의 차별적인 모습들이 드러난다.


   네 번째는 ‘영지’라는 한문 선생님이 은희의 삶에 들어오면서 남긴 의미들이다. 은희와의 첫 만남에서 선생님은 두 아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을 물어본다. 은희에게는 누군가 물어주길 바랐을 질문이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질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춘기의 은희에게 방향성을 잡아 주는 듯한 질문이기도 했다. 또한 영지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칠판에 적었던 문장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相識滿天下(상식 만천하) 知心能幾人(지심능기인)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알아줄 이는 몇일까”

   은희 역시 얼굴을 아는 사람의 수는 400명가량 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냐는 영지 선생님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그만큼 누군가의 마음을 아는 것은 힘든 일이며, 그런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기도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또한 은희의 시선에서 바라본 선생님의 책꽂이 속 책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의 책꽂이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노동 가치 이론 연구’ ‘논리와 비판적 사고’

등이 꽂혀 있었다. 이는 선생님이 삶의 본질에 대해서 사유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영지 선생님이 노동과 관련된 사회 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는 장치들이다.

  또한 “너 절대 맞지 마.”라는 선생님의 진심 어린 충고는 은희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은희는 그 이후 영지 선생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 채, 그녀를 비하하는 원장 선생님에게 큰 소리를 낸다. 선생님을 만나고 은희는 아닌 것을 바로잡고,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영지 선생님이 사라진 뒤, 하나의 소포가 온다. 그 소포에는 크레파스와 은희가 빌려준 책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영지 선생님의 편지가 들어있다. 편지의 내용은 결말부에서 알려주었다. 영지 선생님은 그 편지 속에서 은희에게 말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생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정의해 준 담임선생님과 달리 영지 선생님은 뚜렷하게 삶의 정의를 해주지 않았다. 선생님조차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치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데, 선택은 자기의 몫이라는 것 같이.   


   다섯 번 째는 손의 의미이다. 영화 속에서는 손이 자주 등장한다. 은희가 방앗간 일을 도와드린 뒤, 손가락을 펴는데 물집이 잡혀있었다. 이는 노동을 한 은희의 손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은희에게 했던 말들 중에서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손’은 단순히 신체 부위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순간 혹은 힘든 순간에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다툰 은희와 지숙에게 불러 준 노래는 김호철의 ‘잘린 손가락’이었고, 이 가사 속에 노동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삶의 수단인 ‘손’을 잃은 사람이었다. 손에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뒤, 다시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영지 선생님이 부르는 노래가 왠지 더 슬프게 느껴졌다.


  여섯 번 째는 은희의 침샘에 자리 잡아 있었던 ‘혹’이 상징하는 것이다. 영화 내내 은희가 목을 만지는 장면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혹의 원인을 알게 되고, 제거하게 된다. 혹을 제거한 뒤, 은희는 자신의 혹이 어디로 갔는지 계속해서 되묻는다. 그리고 혹을 제거한 은희의 표정이 마냥 안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은 즉 ‘내면의 통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내면의 통증도 혹과 같이 덜어지면 상처가 남는다. 그리고 은희의 혹처럼 지금은 비워졌지만,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일시적으로 사라진 건지, 그렇다면 또다시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깨어난 은희에게 문뜩 겁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일곱 번째로 ‘밥 먹는 장면’도 인상 깊게 보았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상의 한 부분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암담한 일들이 일어난 다음 장면으로 밥 먹는 모습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영화의 플롯을 보며 밥을 먹는 장면이 그냥 배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살아간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빠와 엄마가 은희를 챙겨주는 장면들도 간혹 보였고, 이러한 장면들을 보며 ‘밥을 먹는 순간’이 가족 사이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덟 번 째는 성수대교의 붕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 사건을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로 생각을 한다면 이 사건이 절정의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 장면은 ‘사람에 대한 편견’, ‘철거 촌에 걸려 있었던 현수막’ 등 병들어 가고 있던 사회의 모습들이 점점 곪아가며 무너지게 되는 모습을 반영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수희의 남자 친구의 차를 타고 성수대교에 오게 된 은희.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보며, 은희와 수희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이는 두 인물 모두 상처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은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곳. 그리고 수희에게는 다행히 이 길을 지나지 않아 살게 되었지만, 자신을 죽음의 늪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던 공간. 둘은 서로 다른 두려움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사람들과 자신의 상처를 애도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벌새’의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벌새는 1초에 90번까지 날개 짓을 하는 작지만 단단한 동물이다. 첫 장면에서 은희가 집에 들어가고 카메라는 은희의 집에서부터 아파트 전체를 클로징 한다. 이 장면을 보며, ‘은희’가 주인공인 영화 속에서도 세상의 중심은 은희가 아니며 벌새와 같은 작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또한 은희와 지숙이 봉봉을 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선생님의 잔소리를 들은 이후이다. 은희는 선생님의 시킨 구호대로 공부를 하지 않으며, 지숙과 함께 봉봉을 타러 간다. 그리고 그 위에서 힘껏 뛰어오른다. 봉봉을 타며 뛰어오르는 은희를 보며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날아오르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장면은 부지런하게 뛰는 벌새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선생님이 보낸 소포가 오기 전, 집안에 울려 퍼진 밝은 분위기의 노래와 대조되도록 은희가 답답한 듯 날개 짓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렇게 여러 장면들은 제목인 ‘벌새’가 은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강해 보였던 아빠도 은희의 진단을 들으며 오열했고, 오빠도 누나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눈물을 쏟는다. 영화 속에서 두 인물은 그 당시 가부장제의 수혜자라고 느껴졌고, 마냥 강하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그 조차도 상실에 있어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나약해졌다.


  날기 위해 1초에 90번의 날개 짓을 하는 작지만 단단한 ‘벌새’, 우리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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