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나는
깨진 술병과 손끝을 번갈아보며 공연히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맞은편에 누워 있던 그림자는 저물고 그 위로 언어가 잔뜩 묻은 잔상이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상해버린 언어를 걸러내고 나니 남는 건 흰 종이뿐이었고 사라짐 이후에 사라짐이라 차라리 희미함으로 채색되길 바라고 또 바랐다 두 번 다신 선명해지지 말자고 깨진 술병은 이미 깨져버려 쓸 모 없다고
깨진 술병에 고인 술 한 방울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그러니 어디에도 고이지 말고 나를 일으켜 보살피러 가자고
내 손끝은 자주 헤매고 주저한다 무언가 태어날 때 그리고 다듬을 때
눈을 감아도 손끝은 언어를 따라간다
아마도 손끝의 벽은 눈꺼풀이 아니라 지나친 선명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