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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Feb 28. 2024

깻잎을 씻는 기분

깻잎을 씻는 내 옆엔 내가 없다

내 옆에 없는 나는 내가 깻잎을 씻는 동안 시를 쓸 수 없고

문예지를 아무리 훑어봐도 내가 쓴 시는 도통 찾을 수 없다

 

오래전

간간이

살아낸

어떤 이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 옆을

따라다닌다.

내 옆엔 내가 없고 그 어떤 이가 여전하게 있다


오래전 폐기한 마음을 도로 가지고 와서 살려달라 애원하는 그이에게 까끌까끌한 깻잎을 밥 위에 올려준다


내가 기다리는 건 질서 속에 출구와 무질서 속 영원함이라

어디로 손을 뻗어도 닿으면 아프다


내 앞에서 그이는 아무렇지 않게 삼킨다

조그마한 입안에서 깻잎과 밥알이 뭉개지고 망가진다

깻잎이 누워있던 자리에는 잎을 잃은 잎자루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그이는 내 손에 바라고 기대하며 기다린다

나는 또 한 번 깻잎을 씻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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