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by 남은불

"아직 늦지 않았어요." 상담 중 그가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신호등의 초록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달렸다.

반대편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빨간불로 바뀐 횡단보도 앞에 혼자 남았다.


다른 신호등을 만났다.

뛰어간다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꿈치가 지면을 밀어내며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잠시 들린 뒤꿈치가 무겁게 지면에 닿았다.

결국 뛰지 못했다.


그 순간, 계산기가 멈췄다.

오랫동안 몇 년이 지났는지 계산해 왔다.

통장 잔고는 쌓이지 않았다.

쌓인 건 나이뿐이다.

흘러간 사실만 남았다.

그 값은 내 뒤꿈치를 들어 까치발을 서게 만들었다.

까치발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초록불이 다시 깜빡인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발바닥을 땅에서 천천히 떼었다.

발자국이라도 남도록 땅을 세게 짓눌렀다.

갈비뼈 밑이 저려왔다.

늦음을 발목에 매단 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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