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는 삶
정상성이란 권력의 카르텔에서 벗어나 그 정상성과 멀어진 삶을 남들 보기에 특이하게 살아도 그 삶이 괴상해도 존재가 이상하다 여겨져도 외로워져도 나로 살겠다 선언하는 것의 가치를 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사람들이 성소수자도 사랑하는 존재로 비성소수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지만 성소수자의 삶은 비성소수자와의 삶과는 꽤 거리가 있다. 서로의 처지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어제는 애인의 사촌 형이 차를 태워줘서 같이 타고 갔는데 애인이 나를 사촌 형에게 친한 형으로 소개하는 장면과 마주했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애인의 처지를 존중한다. 그의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도 이해가 된다. 요즘은 애인이 나에게 뭔가 떠 먹여 줄 때 주위 눈치를 보게 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거리에서 애인을 자기로 부를 때 스스로 조심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 당당해져라 어쩌고 그러는 사람도 있다. 뭐 그런 사람이야 사람 취급 안 하면 그만이지만 일상에 도사리는 혐오를 기반으로 한 성소수자의 삶에 대한 위협은 자부심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삶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삶에 대해서 그것이 차별이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동성애를 확산시켜 출산율이 낮아져 국가가 붕괴된다는 논리가 먹혀드는 사회.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하면 안 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서 더 다양한 상상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얼마나 천박한 태도를 가지는지 이 천박한 사회가 건강권을 위협한다. 정서적 어려움으로 정신건강 의학과 진료를 받게 하고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에 취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또 누군가 실제로 죽거나 사회적으로 죽어버리게 만든다. 끊임없이 삶에 대한 보호를 위해서 스스로의 모습을 감춰 버리게 만든다.
나는 곧 40대 중반이 된다. 생애주기 별 어쩌구로 보면 이미 결혼을 하고 자녀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될 정도의 나이란 소리다. 하지만 그 정상성이 만들어 낸 생애주기 별 어쩌고에 포함될 수 없는 나는 꾸준히 나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차별을 삶에서 경험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부분들을 나에게 조심해 줬으면 좋겠는지 그걸 또 스스로 말해야 안다고 말해 달라는 사람들도 나는 이제 좀 지친다. 뭐 죽을 때까지 나는 왜 아저씨인데 혼자 사는지 또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나는 게이인데 어쩌고 저쩌고 해야 할 삶을 수긍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나라는 이유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삶의 전제가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