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좁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 있었다.
미대 입시 실기 시험을 보러 갈 때 급하게 탄 택시의 기사님. 합격 후 그 택시를 다시 탔다가 만난 순간.
(남학생이 미대 실기를 보러 물통, 화통 등 준비물을 바리바리 싸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셨단다.)
고 1 때 절친한 친구의 친구로 알게 된 녀석. 20년 뒤 회사에서 만나 그 절친보다 더 친하게 지내고 있는 지금의 순간.
또 한 번 세상 참 좁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 있었다.
첫 직장의 팀장님을 10년 만에 회사 대 회사로 다시 만난 일이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회사는 낭만만 갖고 입사했던 곳이었다.
좋아하는 일로 돈도 벌면 얼마나 재밌을까. 정말 순진했다.
야근, 철야에 주말근무까지.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 지겨워질 수 있다니.
난 열정이 없는 사람인 건가. 이래놓고 디자이너 맞나. 매일 고민했다.
허우적대는 현실의 벽 앞에서 위안이라면 팀장님의 일에 대한 열정과 태도였다.
나 포함 여러 명의 풋내기 디자이너를 모아 수업하듯이 기획부터 설계, 마인드, 디자인 툴까지 아낌없이 가르쳐 주셨다.
한 달에 한 번은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의 대학 시절,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그분의 남편분과도 종종 어울리고 함께 여행을 갈 정도로 격의 없이 지내며 빡빡한 회사 생활을 이겨나갔다.
우리 풋내기 디자이너들은 서로 행운아라며 좋은 팀 분위기를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다.
너무 가까웠던 게 문제였을까. 일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게 문제였을까.
막내 디자이너와 팀장님 간의 첫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도 점점 지쳐갔다.
by 공감수집가일이 떨어지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한다와 조율도 필요하다 사이에서,
실력을 키워서 인정받으면 보상받는다와 받는 만큼 일한다 사이에서,
사명감과 삶의 질 사이에서,
이직을 결심하고 어렵게 팀장님께 말씀드린 날,
뜻밖에도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하던 프로젝트는 마무리하고 퇴사하겠다고 두어 차례 말씀 드렸으나 완강했다.
송별회도 없이 그냥 그렇게 나왔다.
나를 시작으로 팀원 모두 각자의 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현 팀장님이 찾은 갑작스러운 미팅에 명함만 달랑 들고 들어간 자리에서 전 팀장님을 10년 만에 만났다.
서로 놀랐고 반갑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담당자가 될 거라는 말이 더 부담스러웠다.
우리 측에서 해당 업체의 제품을 검토하는 업무는 그저 불편했다.
다행히(?) 협업 프로젝트는 무산됐고 이후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돈독했던 처음과 달리 훈훈하지 못했던 마무리는 업계 찐 선후배로 만날 뻔한 재회도 앗아 갔다.
서로 생각이 달랐을 뿐,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떤 선배로 기억될까.
좋은 후배보다 좋은 선배 되기가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걸 이젠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