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과의 보이지 않는 대결

내가 유일하게 이겼다고 믿는 한 가지

by 공감수집가


내 평생의 라이벌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내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다.

살아생전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그분의 전설은 지금도 회자된다.

단 한 번도 짜증을 낸 적 없던 아버지.

엄격하면서도 자상했고, 무뚝뚝하지만 깊은 사랑을 품은 분.

그의 일화를 말할 때면 자매들의 눈빛은 아직도 반짝인다.

그런데 내가 그 완벽한 장인어른보다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애정 표현'이다.

나는 ‘표현하는 사랑’에 진심이다.

어쩌면 그게, 나만의 방식으로 장인어른을 닮아가는 길이 아닐까.


사랑은 닿을수록 따뜻해진다

신혼 초, 우리는 불꽃이었다.

감정이 가슴에 차오르면 그대로 폭발했다.

"이건 아니잖아!"

"네 잘못이야! 네가 먼저 시작했다고!"

술잔처럼 깨진 저녁, 밤새 이어진 냉전.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하루가 아니라 한 주가 무너졌다. 하지만 시간을 갖고 마음을 조금만 가라앉히면 될 일이었다. 정말 별 거 아니었다.

이제 십 수년의 결혼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전처럼 각을 세우는 일은 줄었다.

어쩌다 말다툼을 하더라도 규칙이 생겼다. 자기 전에는 반드시 화해한다.

"미안해. 오늘 내가 예민했어." 서로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가끔은 아무 말도 필요 없다. 단지 손을 잡고, 체온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들과의 어둠 속 대화

밤이면 아들에게 훈육할 때가 있다.

"안 자? 10시 30분에는 자기로 한 거 아냐? 아빠보다 더 클 거라며? 잠을 안 자는 데 언제 크려고?"

"또 유튜브야? 지금 이럴 시간에 책 한 장이라도 읽는 게 낫지 않아?"

잔소리는 점점 길어지고 목소리는 커진다.

밤늦은 시간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는 나도 녀석도 절대 듣기 좋을 리 없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 내가 또...'

조명을 끄고 나란히 누운 침대 위에선 톤이 달라진다.

"아빠가 부족했어. 방금 소리 질러서 미안해."

어둠이 낮춘 목소리로 진심을 말한다.

"앞으로는 더 차분하게 말할게. 아들도 약속 지켜줘, 응?"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쥔다.

"알았어. 나도 약속 지킬게."

그리고 한마디 한다.

“아빠, 수염 까끌까끌해. 내일은 면도 좀 해.”

아내는 의아해한다.

"평일에는 그렇다 치고, 주말에 왜 이렇게 깔끔하게 면도해?"

대답 대신, 나는 아들의 볼에 내 볼을 살짝 비벼본다. 깔깔 웃으며 내 볼을 쓰다 듬는다.


세대를 건너뛴 표현법

우리 부모님 세대는 표현에 서툴렀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뜨거운 밥을 준비해 주셨고, 포옹 대신 몰래 지갑에 만 원을 넣어주셨다. 수줍은 사랑 표현이었다. 자식들이 집안 대소사, 돈 이야기 따위에 신경 쓰지 않도록 철저히 함구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나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사랑,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진심.

"사랑해"라는 말은 내게 취침 전 의식이 되었다. 또한 내가 요즘 관심 갖고 있는 것들, 고민거리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아내가 곧잘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아빠는 평생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어. 언제나 의연했고 올곧은 이미지만 남아 있거든. 근데 아빠도 분명 힘들고 아픈 순간이 있었을 텐데... 너무 티를 안 내고 혼자서 다 해결해 오신 것 같아서 안쓰럽더라고."

그러다가 웃으며 덧붙인다.

"그런데 너는 걱정이 안 돼. 고민거리가 있으면 바로 표시가 나거든. 쫌만 찌르면 술술 나오고. ㅎㅎ 어쩌면 아무것도 몰랐다가 터져 나오는 것보다 조금씩 신호를 보내는 편이 나은 것 같아."


사진: Unsplash의 Dmitry Rodionov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해

어느 날 우리 연애 사진을 보던 아들이 물었다.

"엄마 아빠는 둘이 있을 때가 더 행복했어?"

아들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답했다.

"그럴 리가. 한결이가 우리에게 오고 나서 비로소 완성되었지."

그 말에 아들은 내 볼을 꽉 붙잡고 말했다.

“내가 우리 집 대장이지?”

사랑은 가만히 쌓아두는 게 아니다.

매일 꺼내 쓰는 것이다.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를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일은, 오늘 ‘사랑해’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떠나게 될 때, 내 가족들이 기억하는 것은 완벽한 남편도, 완벽한 아빠도 아닐 것이다.

그저 매일 밤 "사랑해"를 속삭이던 남자.

까끌까끌한 볼을 비비며 웃던 아빠의 온기를 기억하길 바란다.


장인어른의 침묵하는 사랑도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소리 내는 사랑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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