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든 생각이 아니다. 오랜 기간 해오던 생각이다. 단 하루라도 나답게 살다 죽고 싶다. 평생을 나의 기준이 아닌 남의 기준으로 살아왔다. 내가 오롯이 주체적으로 한 생각과 행동이 있을까?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타인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타인이 내 생각과 행동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일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있다면 오직 생존을 위한 생각과 행동 외에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자신의 무인도 생활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바위 등에 기록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간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타인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평생을 내가 아닌 남의 기준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남'은 도대체 누구일까?
'남'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니, 어렴풋이 유년 시절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부모님, 친척, 선생님 등 어른들의 목소리다. "OO 해라, OO 하지 마라. 이래야 안전하고 저래야 행복하다"등의 목소리다. 복도에서 뛰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학원 빠지지 마라, 공부 열심히 해라, OO은 OO 해 보이니 나쁜 아이 같다. 어울리지 마라, 공부를 잘하면 인생이 편해진다, 좋은 대학교를 가라, 대기업을 가라, 아이를 낳아라, 아파트를 사라 등등' 끝없는 목소리들이 밀려온다. 백지장 같은 유년 시절 나는 어른들이 일러준 대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그 목소리들은 깜깜한 내 인생에 등불이 되어 좀비처럼 따라 걸어왔다.
어렴풋이 내 인생이 좀비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뒤를 돌아보니 너무나 먼 길을 와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내가 가진 유일한 선택지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방향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말뚝에 발이 묶여 살던 코끼리와 나는 비슷한 처지다.
발에 묶인 매듭을 떼어내어도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이제야 방향을 바꾸고 싶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한 번도 말뚝 주변을 떠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뚝 주변을 서성이다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슬프다. 내가 얼마나 높이 뛸 수 있을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떠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심지어 내가 코끼리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휑뎅그렁한 초원에서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마음껏 뛰어다니는 야생마 일 수도 있고 사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내가 코끼리인지 야생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유롭게 나를 마음껏 펼치고 표현할 수 있다면 코끼리어도 좋고 야생마여도 좋다.
단 하루라도 좋다. 오직 나답게 사는 것이다. 여태 누군가가 일러준 환영과 환청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목소리에 따라 나의 삶을 살기 위해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는 것이다. 그렇게 뚜벅뚜벅 내 길을 단 하루라도 좋으니 걸을 수만 있다면 이 생을 마감하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궁금하다.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은 내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