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지 인생의 법칙 - 조던 B. 피터슨 -
요즘 피터슨 교수에게 푹 빠져있다.
아저씨의 인물도 인물이지만, 그의 명료한 메시지와 빈틈없는 논리는 나처럼 허무맹랑한 자유주의자에게는 빛이요 소금이다. 그는 나처럼 도덕적 상대주의에 빠진 헛똑똑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이것도 나름 가치가 있고 저것도 나름 가치가 있다. 세상에는 다채로운 가치가 있으니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단 각자가 가진 미덕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것에 '관용'을 보여 상대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태 위와 같은 말을 절대적 진리인 양 신봉하며 20대와 30대를 보내왔다. 세상에는 확고히 정해진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여태 종교 한 번 믿어 본 적이 없었고, 종교인들을 은근 무시하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어떤 보편적 진리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믿는' 수준까지는 갈 수 없었지만, 보편적 진리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비상식적 생각으로 살았다. 우주가 있고, 별이 있고, 태양계가 있고, 지구가 있고, 중력이 작용하는 현실에서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말은 내가 현재 여기 지구에 존재하는 한 성립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사실 외에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상대적이라 생각했다. 세상엔 절대적 악이 없고, 절대적 선이 없다. 천사가 없고 악마가 없다. 인간 세계에는 언제든 천사가 악마가 될 수 있고, 악마는 천사가 될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다. 노자의 무위 자연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더이상 도가 아니듯이 내가 무언가에 내 나름의 가치를 붙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부처님이 말씀 하셨듯이 '모든 것은 변하기에' 그 변하는 모든 것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좀 들고 보니 내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던 것 자체가 모순이다. 절대적 진리 자체가 없다는 논리를 절대적 진리처럼 믿고 살았기 때문이다. 무지한 인간들에게 흔히 보이는 실수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전체 주의를 사회악이라며 빨갱이를 때려잡던 매카시즘이 자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과 같다. 나 또한 그리 살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이 싫어요 하며 독재를 옹호하듯
친일파가 싫어요 하며 절대선을 자청하듯
나 또한 상대적인 가치에 대한 관용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절대적 신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상대주의가 옳으냐 절대주의가 옳으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질서냐 혼돈이냐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그 중간에 서서 '질문'했어야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믿는 것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가?
나이 40 앞에서 이런 사춘기적 고민을 하는 요즘 나는 조던 피터슨 교수를 만났다.
이 챕터의 글을 읽고 나니 제목을 약간 다듬고 싶었다.
'당신 자신을 누구보다 가장 먼저 돌보라'
그의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전제가 하나 있다. "Life is Suffering, 삶은 고통이다" 삶이 고통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그리고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이 끔찍해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이 이 삶이란 것을 짊어지기엔 너무나 나약하다. 그래서 인간에게 삶을 고통이다.
죽음 앞에 매 순간 놓여있기에 인간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동의하는가?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달리 보이겠지만, '보이는 것'은 말 그대로 '보이는 것'일뿐이다.
'얼마나 세상을 좋게 보는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다시 두 번째 법칙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가장 먼저 우리를 돌봐야 할까? 그 이유는 바로 삶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취약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취약하고 나약한 나를 먼저 잘, 그리고 극진히 돌보는 것이다.
그럼 나를 돌본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말일까?
피터슨 교수에 따르면,
나를 돌본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나를 '좋게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를 좋게 하려면, 먼저 나를 좋아할 줄 알아야 한다. 나를 좋아하게 되면 나를 존중하게 된다.
거꾸로 말해보자.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나를 좋게 할 수 없다. 나를 좋게 할 수 없다는 말은 나를 잘 돌봐줄 수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피터슨 교수가 본 챕터의 제목을 왜 저렇게 정했는지 이해가 간다. 나를 잘 돌본다는 말은 나 자신을 돕는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이해가 된다.
피터슨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나 자신을 책임지고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는 것은,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다는 뜻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또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아이가 원할 때마다 사탕을 주면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렇다고 사탕이 아이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여태 내게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쫓으며 살았다는 것이다. 서두에 말했던 '상대주의'라는 덫에 걸려 내가 좋으면 나름 가치가 있다고 자위하며, 내 몸과 마음을 망치는 것일지라도 단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그리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이제라도 바로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항상 깨어 있는 존재로서 나와 남을 배려하고, 정정당당하게 성공하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여기서 큰 물음이 생긴다. 그럼 이렇게 살기 위해서 나는 무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마침 피터슨 교수가 나에게 이에 대한 답을 아니 질문을 던져주었다.
나 자신을 제대로 보살핀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어떤 일을 해야 과감하게 도전하고, 신나게 일하며, 세상에 도움을 주고, 기꺼이 책임을 지며,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시간을 어떻게 써야 더 건강해지고 더 많이 배울 수 있을까?
그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지금의 당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또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삶에서 혼돈을 줄이고, 질서를 재정립하며,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또 당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결국에는 원망과 앙심과 잔혹성을 떨쳐 낼 수 있다.
이것이 피터슨 교수가 말하는 나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방법이다. 요즘 당신이 삶이라는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돛단배 같다면 반드시 그의 말을 귀담아들어보자.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리고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면 실천해 보자. 조금씩, 하나씩 그렇게 실천하다 보면 언젠간 우리가 우리를 잘 돌봐주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