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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성이 Aug 08. 2022

신혼여행에서 생긴 일

절대 이런 외모로 생기지 않았으면 했지만 제 의지와 상관없이 동남아시아 쪽 국가 사람들의 외모를 닮은 저의 학창 시절 별명은 "싸와디 깝"이었습니다. (끼리끼리 논다고 가장 친한 친구는 "압둘라"라고 아랍의 국왕 같은 별명을 가진 녀석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분장하는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간디, 태국 왕자, 태국 공주 등의 신분 변신을 하는 다사다난한 학창 시절을 마치고 졸업 후 처음 취직했을 때 팀장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혹시 성성 씨는 조상님 중에 동남아 쪽 분이 계신가?" 하고 물어볼 정도로 제 외모는 한국을 넘어선 국적을 파악하기 힘든 글로벌한 외모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햇볕을 멀리하는 사무직으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어느 정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이런 외모 때문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회사에서 태국으로 단체 여행을 갔을 때 일정을 마치고 호텔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노부부께서 캐리어 3개를 힘들게 끌고 호텔 입구 쪽으로 오시길래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예의 바른 청년이었던 저는 할머니께서 들고 계시던 가방 하나를 번쩍 들어 묵묵히 옮겨 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제게 미소 지으면서 "땡큐! 싸와디 깝!" 하시며 주머니에서 천 원을 꺼내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 괜찮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한국 사람끼리 서로 도와야죠!'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할머니께서 "아니 이 자식 한국사람이었어? 내가 큰 실례를 했네.." 라며 충격과 당황을 동시에 받으실 거 같아 "깜솨함미따. 뿌인." 이러며 정중하게 천 원을 받으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께서는 "태국 놈이 우리말도 잘하네." 하며 칭찬해주신 건 덤이었고요. 한국에서 한국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멀리 타국에서 칭찬을 들으니 우리말 대잔치에 나가 1등을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물론 천 원을 벌어서 기쁘기도 했고요.)


아무튼.. 이런 저도 기적적으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치렀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갔습니다. 탑승 시간도 여유 있게 남아 있어 저희 부부는 쇼핑도 하고 구경도 할 겸 면세점을 돌아다녔습니다. 와이프는 가방, 화장품 등을 구경했고, 저는 평소 갖고 싶던 만년필을 하나 장만하기 위해 이것저것 제품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면세점 직원 분께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말했습니다. 


"디스 이즈 파커." 그 외에 제품에 대한 설명을 영어로 친절히 하고 계실 때 저는 어리둥절하며 직원 분에게 "저 죄송한데 영어 말고 우리말로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했습니다. 


제 신혼여행의 동반자는 손으로 입을 막고 웃고 있었고, 직원분께서는 순간 당황하신 표정으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한글로 친절하게 제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 외에 화장품, 주류 매장에서도 친절히 영어로 설명을 들었고, 제가 우리말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하면 만년필 매장의 직원 분처럼 당황하실 거 같아 저는 "오케이." "굿" 이렇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신혼여행의 동반자는 제게 말로만 들었지 사람들에게서 외국인 취급받는 광경을 보고 신기하면서 웃겼던 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외국인 취급하더라도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하는 인생의 단 한 번뿐인 신혼여행은 설레며 행복했습니다. 


4시간 정도 비행한 뒤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 현지 가이드 분을 만나기 위해 와이프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의 이름을 적은 표지판을 들고 있는 한국인 가이드 분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저희는 갔습니다. 


와이프가 앞장서고 제가 뒤에 캐리어 등 짐을 끌고 바로 뒤에 따라갔는데, 가이드 분께서 웃으며 와이프에게 반갑게 인사한 뒤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 분은 어디 계세요?"


저도 미모와 지성 그리고 강인한 체력을 겸비한 완벽한 이 여성의 남편인 행운아는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그 행운아가 바로 저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와이프는 "저희 남편, 제 뒤에 있는데요."라고 했을 때 가이드 분은 순간 당황하며, "남편 분이셨어요?"라고 하셨습니다. 가이드 분이 그러셨던 것이 이해가 되는데, 제 외모는 완벽하게 현지에 적응된 외모였을 뿐만 아니라 우기였던 탓에 복장을 편하게 입고 오라는 말에 제가 마치 동네 마실 나온 듯한 완벽하게 편한 복장(슬리퍼, 반바지,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을 해서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가이드 분께서는 제가 공항에서 짐을 옮겨주는 현지인으로 오해하셨다며, 연신 사과하셨습니다. 와이프는 혹시라도 제가 상처받을까 봐 그동안 몰래 웃었는데, 이번만큼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웃었고 가이드 분도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가이드 생활하며 이런 실수는 처음이라는 말과 함께 계속 웃음을 참으셨습니다. 


공항에서 뿐만 아니라 신혼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보라카이 섬에 들어갔을 때 한국인 가이드 분을 도와주는 현지인 가이드(필리핀 인)를 만났는데, 그분의 외모가... 딱 제 키를 20센티 정도 줄여놓은 저의 미니미 같았습니다. 덕분에 신혼여행 내내 그 현지인 가이드는 제게 "형님, 형님" 하면서 저를 안내했고, 다른 한국인 신혼부부 분들은 마치 둘이 친형제 같다고 했던 건 덤이고요. 저희 와이프는 현지인 가이드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는 사모님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하!


그래도 제 외모 덕분인지 현지에서 바가지를 전혀 쓰지 않았고, 다른 신혼부부들이 다양한 잡상인들에게 방해(?)를 받을 때 저희는 저의 빛나는 외모 덕분에 잡상인들의 방해 없이 나름 쾌적한 신혼여행을 보냈던 거 같습니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저희 와이프는 가끔 저를 놀릴 때 이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싸와디 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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