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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성이 Jul 20. 2022

분홍색 소시지의 추억

요즘 새롭게 생긴 즐거움은 일요일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아이에게 밥을 차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장소가 캠핑장이었다면 더 즐겁습니다 ^^) 일요일만큼은 아내가 좀 더 늦잠을 자며 쉬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요리를 못하는 제가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성과 아들의 몸무게를 연말까지 5kg 이상 불리겠다는 의지로 만든 음식을 읍.. 읍.. 하고 견디며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뿌듯하기도 한 마음에 일요일 아침만큼은 제가 꼭 차려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동안 했던 음식들 중 "아들이 견디지 못한" 음식이 대부분이었기에 이번 일요일만큼은 아들이 견딜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두뇌를 풀가동하여 제가 아들 나이였을 때 어떤 음식을 좋아했었나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우 안심, 한우 등심, 한우 살치살, 한우 부챗살, 한우 갈빗살, 한우 안창살...


머릿속에 오직 한우만 떠오릅니다. 이런 한우의 노예 같은 녀석..

하지만 아침부터 구하기도 힘든 그리고 기름진 고기를 먹일 수 없기에 다른 음식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음식은 바로 분홍색 소시지..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분홍색 소시지를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김밥을 들고 소풍을 갈 때 어머니를 졸라 분홍색 소시지와 흰쌀밥만 들고 소풍을 간 적도 있고, 울다가도 어머니께서 "소시지 부쳐줄게!"라는 말을 들으면 벌떡 일어나 히죽히죽 웃으며 밥상으로 향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저는 마트에서 추억의 분홍식 소시지를 하나 사서 아들을 위해 부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에서 굳이 레시피를 찾을 필요도 없을 만큼 조리법은 간단했습니다.


시큰둥하게 "아!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싶은데.." 라던 아들도 마성의 소시지 냄새에 "오늘은 좀 기대되네." 하며 제 옆을 왔다 갔다 합니다. 조리 시간도 그리 길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는 아메리카식 브런치를 먹이겠다고 이것저것 다양한 실험을 하다 브런치가 아닌 점심을 먹였는데, 오늘은 목표 시간에 아이에게 아침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나름 견딜만한, 먹음직스러운 분홍색 소시지 부침을 완성해냈습니다.

외관상으로도 멀쩡해 보이고, 심지어 맛! 맛! 까지 있는 소시지 부침을 아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제가 어린 시절 지금 아들 정도 나이였을 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저희와 떨어져 지내셨고, 어머니께서도 회사에 다니셨기에 하교 한 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학교도 전학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도 없었고, 집 앞마당에서 혼자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놀거나,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이 전부였습니다. 그 당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며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을 미리 배웠으면 지금 제 인생이 180도 바뀌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금지된 열매와도 같던 만화책을 주로 읽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혼자 집에 있을 저를 걱정하셔서 매일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시고 출근하셨음에도, 떨어진 과자도 주워 먹고 다닐 정도로 왕성한 식욕이 있던 저는 그 간식으로는 허기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먹이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어디 떨어진 과자 없나 동네 골목을 두리번거리고 다녔습니다.


동네 골목에서 방황하고 다니던 저는 장을 보고 오시던 주인집 할머니와 마주쳤고 제 얼굴에 배고픔이 가득 묻어 있었는지 "성성아, 여기서 혼자 뭐해? 엄마 기다리니? 얼굴이 왜 그래? 배고파?"라고 물어보셨고, 저는 당연히 배고프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제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셨고, 좀 만 기다리라는 말씀과 함께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주로 드시던 반찬들이 9살 아이였던 제 입에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배려와 고마움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반찬투정을 하기 시작했고, 당황하신 할머니께서는 "성성이 그럼 뭐 먹고 싶은데?"라고 물어보셨고 저는 "소시지! 소시지!" 하고 짜증 내며 대답했습니다.


"할머니가 가게 가서 금방 사 올 테니까 기다려." 할머니께서는 허겁지겁 지갑을 챙겨 가게로 달려가셨고, 잠시 후 '뭐였더라?" 하는 표정으로 다시 오시더니 "성성아 그런데 네가 먹고 싶은 게 뭐라고 했지?"라고 물으셨습니다.


"소시지!! 소시지요!"


아.. "또떼디가 아니고 소시지 구나."


할머니께서는 가게에서 소시지가 아닌 "또떼디"를 달라고 하셨고, 아마도 "또떼디"가 뭐지 하던 구멍가게 아주머니께서는 당황하시며 그런 이태리어도 라틴어도 아닌 낯선 단어를 가진 물건은 없다라고 하셨을 겁니다.


결국 저는 할머니 손을 잡고 함께 소시지를 사 왔고, 할머니께서는 가게 사장님께서 알려주신 조리법대로 부랴부랴 부쳐주셨고 저는 그날의 소시지를 잊지 못할 만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어머니께서는 할머니께 고맙다고 인사를 몇 번 하셨고, 다시는 배고프다고 할머니에게 밥 달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린 제가 그런 어머니의 말을 들을 리 없었습니다. 저는 배만 고프면 당시 안집이라 부르던 할머니 집으로 달려가 "밥 주세요! 또떼디 주세요!"를 외치고는 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할머니는 마치 오랜만에 친손자가 온 것처럼 "그래 우리 성성이 또 또떼디 먹으러 왔구나." 하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시지를 부쳐주시고는 했습니다.


할머니와 밥을 먹고 나면, 할머니께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와 평상에 누워 그렇게 하기도 싫던 숙제를 스스로 하기도 했고 할머니를 따라 산에 나물 캐러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께서는 글을 읽지 못하셨는데, 제가 국어 책을 읽으면 그 글을 함께 따라 읽으시며 할머니께서도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네요.


친구가 없던 어린 시절 저의 가장 좋은 친구였던 또떼디 할머니 (원래 주인집 할머니 이렇게 불렀는데 소시지 사건 (?) 이후로 저는 또떼디 할머니라 부르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이 녀석아 할머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고 하셨지만, 제가 그렇게 불러 드리는 게 싫지만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거나 잘못했을 때 혼나는 소리가 들리면 제일 먼저 달려와 울고 있는 저를 감싸 안고 달래시며, "엄마 말 잘 듣지 그랬어." 라며 말려주시기도 했고, 제가 전학 간 학교에서 뛰어난 처세술과 참신한 공약으로 반장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 할머니께서는 기뻐해 주셨습니다.


몇 년 후 어느 정도 저희 집도 안정이 되어 저희는 할머니와 함께 하던 집에서 이사 가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또떼디 할머니와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어머니께서도 그동안 할머니께 감사했다며 눈물을 보이셨고, 할머니께서도 어디 가서든 지금처럼 건강히 잘 살라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어머니께는 다정한 친정 엄마 같은 존재였고, 제게는 친할머니보다 더 저를 아끼시고 사랑해주시던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아니 제게는 가장 좋은 친구 같은 분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까지는 한 번씩 할머니 댁에 놀러 가 민폐(?)를 끼치며 "또떼디 없어요?"라며 할머니를 괴롭혀 드렸는데, 그 후 더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찾아뵙지 못한 채 소시지보다 소주를 더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줄 소시지 하나를 부치다 갑자기 생각난 '또떼디 할머니'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할머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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