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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성이 Aug 10. 2022

제대 후 로맨틱한 미팅의 추억

# 격동의 9X학번 블루스

미래에 대한 정체성의 고민이 극도로 달한  고등학생 시절 나의 꿈을 키워주고 대학에 기필코 진학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워준 것은 다름 아닌 대학생 형, 누나들이 나오는 판타지 청춘 드라마였다. 대학에만 가면 예쁜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고진감래", "와신상담" 하는 마음으로 나름 치열하게 공부를 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깨달은 현실은 완벽하게 드라마에 낚였다는 것이었다.


대학생만 되면 주변에 여자 동기, 선배들에게 둘러 싸여 풋풋하고 상큼한 대학생활을 보낼 것이라 상상했지만, 내 주변에는 이름이 특이한 놈, 하얀 뚱땡이, 그리고 이름을 부르면 건방지게 들릴 것만 같은 어르신이라고 불러야 할 거 같은 노안인 녀석만 어슬렁거렸다.


이 녀석들과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나도 여자친구도 사귀어 보고 싶었지만, 나의 페로몬 향을 맡고 달려드는 것은 여성이 아닌 녀석들에게 "제발 가라고 아주 가라고" 노래방에서 애타게 외쳤지만 오히려 파리 끈끈이에 찰싹 달라붙은 파리처럼 녀석들과는 더 끈적끈적한 사이가 될 뿐이었다.


그 중 심각한 노안을 가졌던 녀석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는데, 녀석을 처음 봤을 때 이건 재수, 삼수의 개념을 넘어 격동의 제 1공화국 시절 태어나신 분이 뒤늦게 학구열에 불타 고등학교에 입학한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녀석과 나는 입학하자마자 독특한 외모 덕분에, 한 명은 동남아 혼혈 아냐? 하는 의심 눈초리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들 대신 아버지가 학교에 온 거 아냐? 하는 의심의 회초리로 주목을 받았다.


우린 외모때문에 겪는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난 교복 입고 있었는데 성인 나이트 앞에서 "형님 물 좋아요!" 이런 말 들으며 끌려 간 적도 있어. 그리고 아버지랑 같이 있으면 둘이 형제인 줄 알어."


"난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저기요~!' 라고 안하고 '익스큐즈미~' 라고 해. 아니면 조상이 "저짝 나라 사람인가? 이러고 물어보고.."


우린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너는 늙지 않았어. 단지 남들에 비해 아주 조금 연륜 있어 보일 뿐이야.' '너는 토종 한국인이야. 단지 남들보다 입술이 조금 두껍고 피부가 녹슨 구릿빛일 뿐이야.' 라며 위로했다.


그리고 녀석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방에 걸린 유치원 졸업사진을 본 뒤 '어떻게 7살 아이의 얼굴에서 술과 담배에 찌든 40대 김과장의 얼굴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며 녀석은 분명 시공을 초월한 뱀파이어 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같은 반으로 지낸 우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의 저주였는지 모르지만 우린 과는 서로 달랐지만, 대학은 같은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과는 "여자, 여성, Female, 女" 등의 단어는 금지어 취급을 받는 '작은놈, 큰놈, 멀쩡한놈, 이상한놈, 군대갈놈, 군대갔다온놈' 등의 단어로만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대중 목욕탕의 남탕 같은 과였고, 나에 비해 축복받은 녀석은 남자보다 여성이 더 많은 과에서 여자 선배들에게 나이 어린 '어르신' 취급을 받으며 평생 쓸 운을 일시불로 당겨썼는지 많은 여성 주위에서 복받은 새내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후 우리는 비슷한 시기 군대를 다녀왔고, 제대 후 자취방에서 6시 내고향을 보며 향수병을 달래고 있는 내게 녀석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너 나랑 미팅 하러 가자! 내가 지금 너희 자취방으로 갈테니까 같이 꾸미고 바로 나가는거다."


녀석의 전화를 받고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미팅이라는 '인륜지대사'를 이렇게 즉흥적으로 제안하고 추진하다니..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서슴치 않고 하는 기분 나쁜 녀석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주다니 배은망덕한 놈은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잠시 후 녀석은 내 자취방에 헐레벌떡 달려왔고 손에 든 종이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옷 입기 전에 이거부터 빨리 바르자!" 라고 했다. 영어는 아닌데 알파벳을 사용한 희귀한 단어가 패키지에 써 있는 그것의 정체는 바로 이름을 알 수 없는 화장품이었다.


"이것이 바로 비비 크림이라는 것인데, 이걸 얼굴 구석구석 도포하면 너를 한국인으로 보이게 해줄 것이고, 나는 10년 젊게 보이게 해줄 마법의 크림이야."


"에이 그게 말이 되냐. 어디서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거야."


"무식한 태국 촌놈을 봤나. 너 비비크림 모르지? 비비가 뭔지 알어? 베스트 뷰티! 최고로 예뻐지는거야."


평소 녀석의 언행을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진지함을 넘어 사생결단의 표정으로 말하는 녀석의 표정을 보며 이번에는 '진짜다.' 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녀석의 말대로 한치의 부끄러움과 아낌없이 부족함 없이 얼굴에 발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의 얼굴에 부족함 없이 도포했다.


우리가 장렬했던 도포를 마친 뒤 나란히 거울을 바라봤을 때 태국 강시와 늙은 강시가 '여자 친구'라는 미지의 생명체가 생긴다는 희망에 부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외모에 자신감을 탑재한 채 대학로를 걸으며 주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미팅의 장소로 출발했다.


미팅하기로 한 커피숖 건물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주선하기로 한 녀석의 후배는 우리를 보고 흠찟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친구 녀석에게 물었다.


"형, 도대체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에요? 둘 다 왜 이래."


녀석은 당당하게 말했다.


"응 제대 후 첫 미팅이라 신경 좀 썼어. 비비 좀 발랐지."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녀석은 입학 후 첫 미팅이었다.)


비비는 '베스트 뷰티풀' 이라 생각했는데, 후배는 우리를 '배드 비스트'를 바라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의 후배는 핵폭탄 2기를 몰고 전진하는 김정은처럼 우리를 이끌고 커피숖으로 올라갔다.


긴장되는 자리.. 나와 친구는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미지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커피숖에서 유일하게 단 한 명 후배만이 불안한 눈빛으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리따운 눈이 부셔 샤샤.. 아니 아름다운 두 분의 여성이 들어오셨고, 후배는 '미안해. 살려줘. 견뎌줘 제발..' 하는 눈빛으로 그녀들과 우리를 인사시켰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그 여성분들은 우리가 다양하고 처절한 구애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전생에 고문 기술자에게 아무리 고문을 당해도 꿋꿋하게 견디는 독립운동가였는지 우리와의 만남을 이겨냈다.


나와 녀석은 치명적인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안녕하쎄요. 똥남아에서 온 똥짜이 씨 임미다. 한꾹사람 예뻐요. 아주 예뻐요. 감쏴합니다." 내가 먼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과감한 시도를 했을때 녀석도 지지 않기 위해 타고난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 공략을 시작했다.


"아.. 저는 사실 **이 애비되는 사람인데, **이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제가 58년 왕십리, 왕십리 아시죠? 곱창이 아주 맛있는 허허허... 곱창의 거리에서 태어난 58년 개띠입니다. 허허허"


그날 커피숍부터 간단하게 맥주 한 잔 마실 때까지 그날 밤 우리의 외모를 이용한 자학 개그는 계속됐다.

아들을 대신해 나온 아버지와 동남아 유학생의 머릿속에 '로맨틱', '성공적' 이라는 단어를 되뇌이며 결혼식 장소를 고민하고, 자녀계획을 고민하며 헤어질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지만, 그 후 더 이상 그녀와 유선상으로 달콤한 대화 아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그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들은 아마 그 이후로 결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마도 이성에 대한 관심을 끊고 독하게 학업에 전념해 아마 좋은 직장에 취직했을 거라 생각된다.


두 여성의 인생을 긍정적 방향으로 인도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뿌듯하다.

아니면 그날의 충격으로 속세의 미련을 벗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합니다. 두 분 복 받으실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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