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속에 다시 피는 꽃
결핍으로 태어나, 나로 자라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니,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마흔이 넘어서야
나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차분히 바라보게 되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지나온 듯한 시점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너무 늦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비로소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20대의 나는
막연히 내 인생의 만기를 ‘마흔’으로 정해두고 살았다.
그 나이가 되면
성공과 여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 믿었고,
은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만큼 나는 열정적이었고,
치열하고 싶었고,
세상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보고자 했다.
겉보기엔 모든 것이 제법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운 싸움 속에 있었는지
정작 알지 못했다.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나를 지금 이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2025년의 나는
또 다른 모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모순적인가.
아니, 인생은 본래 모순의 연속일까.
그 질문은 조용히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작은 균열들이 모여
내 인생의 모순이라는 이름으로 형태를 드러냈다.
⸻
나를 찾아서, 모순의 일상 속에서
“해야지.”
“오늘도 못했네.”
이 두 문장이 반복되는 하루들.
다짐은 쌓였지만
나는 늘 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 속에서
나는 천천히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6월,
해가 길어졌음을 깨닫던 순간
나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꼈다.
시간은 또다시 계절을 바꾸고 있었고
그 사실이 가슴을 묘하게 적셨다.
그날 서울의 일몰은 유난히 선명했다.
노을 속에서 묘한 희망이 일렁였고,
일출보다 일몰이 더 청량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알았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
나는 그동안 나답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내 인생의 설계자는 언제나 나였다고,
내 방식과 내 리듬을 지켜왔노라고.
그러다 코로나가 찾아왔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역병.
전 세계가 멈춰버린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살기 위해 더 치열하게 움직였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업의 방향도 조정해 나갔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과 달리
몸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정은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금이 가고 있었다.
내 삶에도
강제로 쉼표가 찍혔다.
⸻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 인생에 찍힌 쉼표였을까,
아니면 어떤 장을 마무리하라는 신호였을까.”
코로나 이후
나는 내 결정들을 되짚어보며 후회하기도 했다.
가정사, 사업, 브랜드 방향성, 삶의 우선순위…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잔다르크처럼 버티며 살아냈던 시간들이
어느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가장 믿었던 존재가 등을 돌렸을 때
나는 두 번째 상실감을 경험했다.
첫 번째 상실감은
첫 아이 출산 직후 찾아왔고,
두 번째는
둘째를 키우던 시절
아무도 모르게 밀려왔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나는 나를 잘 몰랐다는 사실을.
⸻
혼자일 때의 인생과
책임이 생긴 이후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책임이 커질수록
모순도 커졌다.
삶의 얼굴은
그렇게 간단히 바뀌었다.
그리고 그 모순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흐려지고
어느 순간부터
역할만이 나를 대신하고 있었다.
최고의 엄마,
최선을 다하는 아내,
부모를 생각하는 딸…
그 모든 역할 속에서
나는 조용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
효녀의 종말
나는 효녀였을까?
아니면 효녀라고 믿고 싶었던 걸까.
부모님을 누구보다 아끼고 존경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믿음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부모로부터의 정서적 독립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나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줄 알았지만
정작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던 시절이 더 많았다.
타인의 기대와
나의 욕망 사이에서
나는 늘 조금씩 어긋나 있었고,
관계의 균열은
아주 작은 틈에서 자라났다.
⸻
결혼 전의 가족과
결혼 후의 가족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 이념의 흔들림 속에서
나는 더 크게 요동쳤다.
가장 친했고
가장 의지했던 존재에게서 받은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말했다.
“너는 말에 칼이 있다.
네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찢어진다.”
나는 사랑해서 한 말이었다.
잘 살길 바라는 마음,
책임 있게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뱉은 말들이
결국 우리 사이를 단절시키는 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닫는 사람이 되었다.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
부모님 세대는 말했다.
“우리는 낀 세대야.”
마치 시대의 희생양인 듯.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면을 보았다.
준비되지 않은 어른들,
체면을 먼저 챙기고
책임은 뒤로 미루는 세대,
현실에 대한 이해 없이
막연한 존경을 요구하는 어른들.
나는 효녀이고 싶었고
어쩌면 효녀였을지도 모른다.
아빠의 늦은 퇴근길 뒷모습,
새벽에도 먼저 일어나던 모습…
생각만 해도 지금도 마음이 저릿해진다.
그러나 그 마음은
어느 순간 방향을 잃고,
방법도 잃고,
너무 현실적인 내 말투에 묻혀버렸다.
그들은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보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했지만
나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곱절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극도로 현실적인 시선,
실존적인 사고방식,
애정이 깊을수록 독해지는 말투.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사이를 조금씩 찢어놓았다.
⸻
효녀는
그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마지막 흔적을 뒤로한 채
천천히, 아주 조용히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