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의 유통기한
비가 그친 다음 날이라고 해서
마음까지 곧장 마르는 것은 아니다.
어제의 감정은 대개 이름도 없이 남아
오늘의 숨결 속에 눅눅하게 섞여 든다.
나는 쉬운 사람이 아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외투처럼 무거울 때도 있고,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 물가처럼
아슬하게 마음이 서 있을 때도 있다.
세상은 이런 나의 깊이를
좀처럼 받아주지 못했다.
아니, 반겨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덤덤하게 지내다 보니
어느 날엔 감당하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 안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곤 했다.
나는 늘 앞서가거나,
혹은 뒤처지거나.
평범한 ‘중간’은 없는 삶을 살아왔다.
모든 일을
감정을 절제한 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들 앞에서
나는 유독 예민해졌고,
웅덩이에 발이 빠지듯
자주 넘어졌다.
관계 속에서
나는 종종 불편한 사람이 되었다.
말을 줄이고,
생각을 접고,
감정을 미루며
스스로를 멈춰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해진 옷감처럼 닳아갔고
나라는 형체는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이 있었다.
고치려 들지 않았고,
누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내 말이 길어질 때
끝을 기다려 주었고,
내가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들켜버린 순간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해하려 애쓰지도,
판단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이런 나여도 괜찮다는 사실을
말이 아니라
태도로 보여주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 고요한 기다림이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사랑은
무언가를 더해주거나
바꿔주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무너지지 않게
그저 사라지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이라는 것을.
여전히 나는 완성되지 않았고
질문은 많으며
쉽게 단순해지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이런 나로 살아도
조용히 지워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오늘의 마음 역시
여전히 이름이 없다.
다만, 누군가 내어준 볕 아래서
조금 오래
머물다 갈 뿐이다.
이 글이
당신에게 닿았다면
그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을
아직 버리지 못한 사람,
넘기지 못해서
스스로를 탓해온 사람이라면.
이 마음의 유통기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살아 있다.
PS
<다음에도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여기서 다시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