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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Jun 16. 2023

시아버지 용서하기

무연고자가 된 시아버지



   서울의 어느 구청에서 우편물이 한통이 왔다.

   시아버지가 무연고자로 등록되어 어느 병원 안치소에 있으니 어떻게 하겠냐라는 것이다. 남편은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된 건지 문의했고, 병원에도 문의를 한 결과 시아버지는 암으로 다니던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시신이 한 달 넘게 안치되어 계신다는 내용이었다. 병원에서는 구청으로 무연고자 통보를 했고 호적으로 올라가 있던 우리에게 연락이 되었던 것이다.


 시아버지는 우리와 10년 이상 연락을 안 하고 살았다. 남편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두 분은 이혼하셨고 결혼식 때 혼주석에서 한번, 신혼여행 돌아와서 집들이 때 한번, 명절에 한번 그렇게 세 번 본 게 다였다. 그마저도 볼 때마다 남편과 싸워서 서로가 불편한 관계. 



시아버지는 부모이기보다는
 남자로,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어 했던 사람 같았다.

 


    남편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밀린 시신 안 치료와 남은 병원비, 장례 비용까지 감안하면 그 돈은 천만 원 대 이상이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내가 가진 시아버지의 적대감을 알고 있기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신혼 집들이에서 시아버지는 친정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로 나는 시아버지란 존재에 질려버렸고 그 이후의 사건과 언행으로  시아버지를 미워했지만 , 좋든 싫든 남편의 아버지이니  그런 분의 마지막을  무연고자로 처리되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여전히 안 좋은 감정인 사람이라도 , 내가 종교라는 걸 가진 후 내가 배운 용서, 사랑이라는 기준에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시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시아버지가 우리에게 했던 모들 말들, 모든 행동들을 잊고서 편안히 좋은 마음으로 보내주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에게 미안했지만 죽은이에게 내가 해줄수 있는, 내가 종교를 통해서 배운 최선의 결정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장례를 치르자고 했고, 장례절차를 밟았다. 시신을 서울에서 우리가 사는 곳까지 이송하고 염을 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모시는 일은 생전 처음 하는 일이었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으며 아이를 맡길 데조차 없는 우리라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 날이기도 했다. 우리를 전적으로 도와주시는 대모님이 안 계셨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의 여생을 마무리하는  일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조차 없는 차량이 재산으로 드러났고 여기저기서 빚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적게는 핸드폰 요금에서부터 카드빛에서 몇천만원에 이르는 대부업체 빚까지. 성실히(?)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적잖히 당황했다.  특히나 대부업체에서 빌린 돈은 기어이 소송까지 가게 됐고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재판이란 것에 참여해야만 했다. 한정상속승인 절차를 밟으면 그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소송까지 가게된 것이다.






  함께 다녀온 재판은 몇 번의 "예"라는 대답에 십 분도 채 안돼서 끝이 났고 판결은 8월에 나온다는 판사님의 말로 끝이 났다. 꽤나 긴장했던 것에 비해서는 싱겁게 끝나버린 재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다니며 항암 하러 서울역에 왔던 날들이 생각났다. 희망과 불안을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여정들이었다. 내겐 아픈 기억이었던 곳. 다시는 오지 않게 되길 바랐지만 삶이란 게 어디 그런가? 얽히지 않는 것이 좋다는 송사라는 일로 다시 오게 될 줄이야.


그전의 나라면 왜 이런 일이
휘말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 이후, 시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는 많이 달라졌다.  죽고 아픈 일로 서울에 오는 일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알게 되었고, 또한 시아버지의 장례식을 계기로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는 삶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용서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미움과 원망이 얼마나 사람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갉아먹는지 편해진 다음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또 험난한 산을 넘고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함께 손잡고 넘는 산은  단합된 마음과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며 그 과정에서 더 단단해지는 서로를 발견한다. 앞으로 어떤 결론이 나게 될지, 또 어떤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무한히 감사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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