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자취를 따라서
어쩌다보니 너무 오랜 시간을 흘려보낸뒤의 뜻하지않은 장소에로의 여정길...
기억도 가물거리던 신안군 지도면 그 다음 주소가 우편봉투에 써있던 희미한 글자로 외엔 입안에서 떠오르지조차 않던 곳....
나의 아버진 어린시절. 섬을 나오셨었단다...
목포.한양대를 거쳐 미국까지의 긴 그 분의 삶에서..
그 작은 섬은 뿌리였겠다는 생각을. 난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야 느낄 수 있었다.
간혹 사람들은 지역간의 호불호로.
숨긴 채 살아가기도 하지만..
난 충청도 한 중간 당진 출생 엄마와
저 서쪽 바다 끝 자락 신안 지도의 작은 장소 증동리출신의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어쩌면 극히 시골스런 아이였다는 진실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어려서 외지로 나와버리신 탓에 사투리도 별로 안쓰셨던 아빠..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엄마는 아빠의 출생지를 그리 탐탁히 여기지는 않으셨던 느낌이다만...
어린시절 바다바람에 출렁이던 물결 위 작은 배로 갈아타며 섬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 오른다.
명절전 귀한 달력과 양주병을 곱게 곱게 포장하던 내 아빠의 손길과 등이 떠오르곤 한다.
막내 셨던 ,그러나 일찍 집에서 독립했던 아빠의 입장에서는 고향가는 길 앞에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었을까. .
내 결혼 전 본적은 종로구 연건동 198번지였다.
그래서였나 날 더더우기 서울 깍쟁이로 알던 친구들....
내 첫 신혼지는 전라남도 광양 포항제철 광양단지 안이었다..
그래서인지 전라도는 나에게 타향이라기보다는 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해버린 기억...
미시간 시절 , 막내 이모부께 처음 들었던 아빠의 미국시절 이야기들. .
아마도 살아계셨다면 내 결혼 이후 아빠께서 술 한 잔을 따라주시며 들려주셨었었을......
그래서였나보다.
어려서부터 아빠의 외교적 옆자리엔 엄마 대신 내가 있던 기억과 추억들..
현충사 잔듸밭에서 미국 성조기 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채 , 코쟁이 아저씨들과 통닭을 뜯던 사진 속의 나..
단발커트에 캐나다 국기 무늬의 옷을 입고 있던 희미한 사진 속의 나..등등등..
맏며느리로 살다보니 , 이해되는 일들이 또 있다.
엄마가 마춰 주시지 않은 빈 자리에 언제나 내가 있었다는 사실.
그렇다고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는 이야간 결단코 아니다.
엄마는 주일마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국수를 꼭 점심 메뉴로 해주셨었으니까...
또 외조부.외조모께서도 아빠를 무척이나 편한 사위로 대하셨던 기억들...
아마도 내가 덜 느낀 점 중에 하나가 어쩌면 엄마보다도 더 많은 배려의 맘을 소유하셨던 분이 내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란 것을...
좋은 기회가 되어 잠시 들려보게 된 신안군 지도면....
아빠의 기일 뒤의 방문이 되 버려서 더 뜻깊었던 찰나의 시간들...
배가 다니던 자리를 다리위 차 속에서... 생경스러웠지만...잊어버렸던 증동리라는 지명이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친할머니께서 아가왔냐....
하시며 아빠를 부르시던 음성과 표정들이 내 눈앞을 스쳤다 파노라마처럼.. ..
아빠의 부재 이후 간간이 연락을 하던 두 큰 집의 큰 아버님들도 다 돌아가신 뒤이고 , 나 역시 한 집의 맏 며느리로 살다보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사촌들과의 연락도. 거의 안하고 살아와버렸다
이곳 저곳 해외 이사 탓도 해 보면서...
아빠가 갑자기 가신 뒤의 난 어쩌면 날개 꺾인 작은 새처럼 내 친정의 행사들은 엄마와 남동생 일 외엔 ..뒷전으로 미뤄버린 탓도 있으리라.
증동리교회의 푯말과 여 전도사님의 순교지로 변해 버린 그 곳이 아..그 기억속의 황량하던 증동리구나...와 더불어 마지막 가시기 전 엄마의 전화속 한 마디가 떠올랐다.
니 아빠가 부흥회 설교를 들으며 그렇게 맑게 어린아이처럼 웃는건 처음봤다 라던...
그리고,
큰 아이의 임신 걱정부터 첫 태몽까지 다 아빠가 꾸어주셨던 ..기억과. 결혼하던 해 사랑니 발취수술뒤 시어른 생신 상을 차리는 장녀가 걱정스러우셔서 시댁 문 앞에 그 귀한 회 한 접시를 살며시 놓고 가셨던 아빠의 마음이 떠 올라서 ..
염전을 돌아보던 희미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렇게 휘익 한 바퀴를. 돌아나오며
한 접시의 병어회로. 아빠를 추억하고.
그 그리움을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