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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Oct 04. 2022

외가의 추억

그곳엘 다녀왔다

이 글을 어디에 분류해야나 좀 망설였다.

남녘에 넣을까.

가을에 넣을까...


그러다 외가에 넣는다.

외가와 친가는 같은 맥락이니까.


솔직히 아빠의 고향 , 친가에 대한 기억들은 조각조각이고 그리 많지도 않다.

일찍이 그곳을 떠나 나오셔  서울과 미국살이를 하셨던 막내 셨기에,

아빠가 그리워했던 아빠의 어머니 즉 내겐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 역시 몇 조각일 뿐 ,,,

내 어린 시절 망원동 우리 집에 묵곤 했었던 제일 큰 아버지 댁의   귀한 하나뿐인 나와 동년배였던 사촌오빠와 작은 둘째아버지 댁의  두 사촌오빠들에 관한 추억은 몇 가지가 존재한다.

한 분은 외삼촌들과 비슷한 연배 셨었고 , 내가 무척 따랐던  둘째 집의 장남.

해군 의장대에 복무 시절 자주 오셨던 둘쨔집의 차남은  손재주가 좋으셔서 올 때 마디 나무 목재로  거북선등을 조립해 장식해놓곤 하셨다.

큰집의 귀한 아들이었던 지홍 오빠만이 그래도 2000년대 들어서 까지 연락이 되곤 했었다만 이제는 실은 연락이 끊겨 버렸다.


사촌언니들 역시 큰집은 거의 이모들과 비슷한 연배 셔서 나와 연결고리가 그리 어려웠고 , 둘째 집 나보다 두 살 많던 혜경 언니는 둘째 큰엄마를 닮으셔 그리 잔정은 없이 차가우셨던 기억뿐이다.

더 솔직히 이제와 느껴진 일들이 있다.

나의 엄마는 충청도 출신이셨다.

엄마에겐 오빠이신 큰외삼촌이 소개하셨던 아빠의 존재중에 딱 하나.. 남도 출신이란 사실만 숨기고 싶어 하셨다는 사실을 난 다 커서야 인지했다.

모 엄마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사회통념상에도 아직도 남도 출신에 대한 고정관념과 지역 간의 갈등이 존재한다 허긴 정치영역 또한 무엇이 다르랴...


해외살이를 해본 나로서는 지역에 대한 통념은 비록 우리뿐이 아님을 실감한다.

미국은 지역을 넘어 백인이 지금도 당연히 과흑인, 황인종에 대해 우월의식이 존재하며, 일본 역시 오사카 지역에 대한 반감 역시 존재한다.

그리다 져보면 오대양 육대주 어디를 가도 차별은 존재하는 것과 백지 한 장 차이이다.

내 결론은 사람나름이라는....


이 글을 읽으며 그 누군가는 어쩌면 나 까지도 그 굴레에 묶어 버릴지도 모른다.


모 이제 올해를 지나 한 해를 거치면 만 60세를 맞이할 내가 그런 일들에 신경 쓸 에너지는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


며칠 전, TV에서 천사 대교를 건너 피플교를 걸으며 피플 섬들을 걷는 여정과 법성포의 굴비, 불암사의 꽃무릇축제가  소개되었었다.

TV를 보던 옆지기가 별안간 영광굴비 한 상에 마음을 빼앗겼고 ( 2020년 가을에 어쩌다 들렸을 때는 코로나로 단체 손님도 발길이 뚝 끊겨버려 만드신 분의 애정도 없던 밥상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 , 그래서 다가온 연휴에 갑자기 떠나버렸던 여정 속의 그곳을 이야기하려다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앞의 여정은 다시 언급하고 오늘은 둘째 날 아침에 달려갔던 내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신안군 증도 근처에 보랏빛으로 포장해놓은 반월도와 박지도를 같이 한바퀘 돌아보련다.


코로나 이전부터 새로운 명소로 입소문이 퍼지던 그곳을 엉겁결에 가게 되었고 장거리 운전의 옆지기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이었지만 , 본인이 택한 여정이었기에...

(참고로 옆지기는 살아오는 내내 나에게 단 한 번도 운전대를 내밀지는 않았었다. 이유는 묻지 않는다.. 나 역시 자차 시절에도 내가 운전하는 차에 옆지기를 자주 태우지는 않았었으니... )


사실 가는 길부터 내내 나는 옆지기 모르게 내 맘 속에서 출렁이는 그 무엇과 같이 엿엇다.


천사 대교를 건너고 두 개의 또 다른 다리를 건너며 옆지기가 혼잣말로 "옛날엔 저 많은 섬들을 어찌 다녔나? " 하길래  아주 오래전 빛바랬던 한 장면을 자연스레 알려주었을 뿐이다.


내 희미한 추억 속에 장면들은 이랫엇다

 가족이 같이 당시의 섬이던 신안군 지도면 증동리를 갔던 겨울 어느 날..

분명 목포에서 커다란 배에 올랐었는데 , 어느 순간 작은 나룻배로 옮겨 타던 우리 남매는 순간 부는 바람에 기우뚱하던 작은 배에서의 무서움이 한 점으로 찍혀 잇다.

그다음 장면은 아마도 그 작은 배로 저건 너 보이던 섬의 부두로 도착했었고 , 마중 나오셨던 큰아버지의 용달 차였었는지 경운기였는지는 확실치 않고, 얼굴이 갸름하셨던 친할머니가 아빠의 이름을 부르며 아빠를 안으셨던 장면과 찐 고구마를  우리들에게 내미시며 총각김칠 숟가락에 얹어주시던 장면,,,


아무튼 신안군엘 들어서면서부터

또한 선교지였던 그곳의 교회들을 지나치며

내 마음속엔 아빠와의 추어과 그리움으로 멍먹했엇던게 사실이다.


그렇게 그 보랏빛 다리와 지붕과 풍경들을 바라보고 돌아섰던 여정을 남겨본다.


다행인 건 그나마 아침 일찍 도착한 탓에 조금은 여유롭고 한적했었다는...


혹시 나하고 몰라 챙겨갔던 보랏빛 블라우스와 스카프 ( 여행 시 가장많이 애용하는 내가 처음으로 면세점에서 샀던 보랏빛 키플링 가방은 실은 20년이 넘었다 )

나오다 어쩌다 찍게 된 이제는 추억이 된 그곳..


시 한 편에 아쉬운 발걸음을 한 번 더 멈춰보던...


급하게 이동이 많아 습관이 돼버린 내 여행가방 사기엔 항상 만반의 대비가 준비되곤 한다^^

그 덕에 (가서 알았지만 ) 입장료 무료! 였다는....


언제고 여유롭게 다시 가고픈 내 아버지의 어릴 적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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