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만화책 동기부터 시작하여, 어설픈 기억에 외삼촌의 대학시절 ( 망원동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시절 ) 주머니에 누가 넣어버린 선전지 덕분에 경찰에 끌려가 고문까지 받으셨었던...)
당진 가던 고속버스 속에서 당시 한참 인기몰이하던 외국 드라마 "태양의 계절"속 주인공과 닮았다고 콩깍지가 씌어버린 그녀 , 외숙모와의 연애시절의 모든 스토리를 공유했고 , 외할머니의 평생의 소원이시던 목회의 길을 늦게 밟기 시작하시고 , 시카고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다가 희귀 암을 앓으시고 회복하시곤 두 분이 미국 시민권과 모든 걸 포기하시고 일본 홋카이도 지역의 오아시스 교회로 사역을 하러 나오시는 커다란 행보까지.
그 교회로 엄마가 돌아가신 뒤 두 분을 뵈러 간 김에 선교까지 알차게 했던 2019년 10월의 나였었다. 또 엄마의 가시던 길을 인도해주신 분도 막내 외삼촌 목사님이셨다
외심촌에게 누나인 나의 엄마는 외삼촌의 휘문고등학교 시절, 한참 배고플 청년이던 그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엇다 소리를 엄마 가시던 길에 듣기도 했었다.
두 주 전 외숙모와의 통화에서 삼촌께서 숙모 손을 꼭 잡고 모든 조카들의자녀들 이름을 하나하나 숙모가 부르시며 기도하신다는 소식이었는데..
외심촌과 숙모에게 난 항상 열살짜리 소녀라셨는데...
큰아이가 어제 전화가 왔었다.
"엄마 내일이라도 갈 수는 있어요!"
얼마나 고마운 말이 덜었는지 모른다 사실은 ,
하지만 다가오는 주말이 차남의 혼인예배이다.
차남의 혼인예배를 핑계로 가시는 길의 배웅은 한 참 뒤로 숙모를 뵈러 큰아이 부부와 오아시스 교회로 가보길 소망해본다.
실은 , 두 주 전 전화기 너머 외숙모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더 시리다.
삼촌이 저렇게 누워서라도 계셔주시는 것을 감사한다시던..
몇 해 전 선교를 가 본 그곳의 외숙모의 하루는 80시간 정도 되는 듯했었다.
삼촌이 몸이 불편햐지신뒤로 새벽에 배 주관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정을 혼자 소화해 내시며 , 식사. 집안일까지 하시는 모습에 일주일간 내가 도맡아 조금이라도 쉬실 시간을 만들어드렸었던 치열한 주님께 바치는 삶의 모습을 낱낱이 봐버렸기 때문에 더 샹생히 느껴지는 슬픔이 잇다.
부디 외숙모가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마시고 잘 버텨내 주시길 기도해본다.
홋카이도 삿뽀로 근교 작은교회로 다시 이동하신 두분이시다
두 분과의 그곳에서의 모습은 2019년 10월 중순이었었다.
마른 무말랭이 10킬로를 박스에 챙겨가 교회의 식구들과 음식 나눔도 , 새벽 예배 반주까지 귀한 시간이 엇었다..
주일에 접한 또 다른 비보는 이태원의 소식이었다.
감히 자식과 가족을 앞서 보냔 분들의 마음을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으랴... 또한 무슨 말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