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저중학교1학년 새내기 시절,. 나는 1학년 2반 반장이었고 그녀는 1학년 1반 반장이었다. (반장이었다는 사실을 서술한 건 벌어졌던 사건의 이해를 위해서일 뿐이다)
사립학교 추첨을 떨어진 난 공립학교엘 갔었고 나의 유치원 동기들을 다시 만나게 된 건 당시의 여자중학교에서였다.
공립국민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배치고사에서 10 등 안에 들고자 솔직히 무던히 노력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덕에 1학년 2반의 반장이란 자리를 거머쥔 것이 그 해 3월, 그렇게 시작된 여중 시절이 나에게 커다란 사건으로 발건한건 6월이었었다.
당시 엄격하신 여자 교장 선생남의 월요일 조회 단상 앞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하필 새내가 인 1학년의 몫으로 1반 2반 반장들이던 그녀와 나는 정중앙 바로 교장선생님의 코앞에 한 시간을 넘게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만 했다.
학급의 다른 학생들은 반장들의 위치로부터 최소 1미터씩 떨어져 두줄로 정렬하던 6월의 뜨거운 햇살아래의 아침 조회 시간이었다
전 날 남동생의 생일 파티로 오징어튀김을 과식했던 누나인 나는 그날 아침 유난히 몸 상태가 안 좋았었고, 안경을 쓴 채로 교장 선생남 아래에서 버티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던 사건이 발생했다.
안경을 쓰고 있던 난 아마도 무의식 중에도 턱을 든 채 얼굴이 모래바닥에 닿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었나 보다.
쓰러진 나 보다 사실 더 놀랜 건 일 미터 옆의 1반 반장이던 그녀와 우리 앞의 두 담임 선생님들이셨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야 듣게 되었었고, 병원으로 살려간 나의 빈자리엔 교장선생님의 말씀만이 마이크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었다는 소식도 나중에야 접했었다. 내용인즉슨 '온실 속의 화초들이라셨단다'
(참 당시의 난 작은 혓바닥을 아홉 바늘이나 꿰매었었다)
아주 아주 나중에 고1 때 미시간으로 이민 간 그녀를 다시 만났고, 그때서야 그 당시 그녀의 놀랐던 사실과 그녀가 날 챙기지 못한 자책감을 갖고 살아왔다는 사살도 알게 되어 얼마나미안했덩지 모른다.
아무튼그런 인연인 그녀는 어쩌다 보니 나의 옆지기와 같은 사립 국민학교 출신이었고, 그 인연 덕에 실은 해후를 할 수 있던 것도 거슬러 2002년쯤이었다
그런 그녀와 더 깊게 이어질 운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다.
2010년 어쩌다 우리 가족의 미국이사가 결정되고, 그녀의 여러 도움을 받게 되어 우리는 무사히 미시간주 노바이라는 마을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이신 현권사님은 내게 소증한 친정이 되어주셨었다.
그녀의 두 해만의 서울출장덕에 , 해후를 할 수 있다는 소색을 접하고, 새로 이사 온 보금바라에서 소소한 밥상을 차렸었다. 한 주 전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