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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녘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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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Jun 05. 2024

남녘의 봄

도심 속의 봄 2

거슬러 2014년, 그곳 갔었다.

늦가을의 그곳 앞엔 커다란 고목인 은행나무가 빛나는 노란 잎들로 가득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아마도 성북동 돌담길 성곽을 따라 걷다 어쩌다 그곳까지 가게 됐었지...

광양시절부터 일본어 동아리 팀의 지인인 70년대 생 그녀가 전화가 왔었다.

"언니, 다음 주에 시간 되셔요? 딜쿠샤 구경 가요 "

딜쿠샤라.... 추억 속의 그곳은 사람들이 실고 있어서 겉모습과 은행나무와 걸어가던 성곽길, 홍난파선생남가옥까지였었다.

젊은 그녀의 반가운 데이트에  당연히  동참을 외치고 , 그렇게 만났던 5월의 햇볕이 뜨거운 날  서둘러 나가  성공회건물부터 덕수궁옆길을 거쳐 (덕수궁담벼락 풍경은 다음으로 ) 정동교회를 지나 그녀와만나밋있게 식사를 하고 우린 서대문까지 걸었다.

그때의 오랜 걸음뒤가 아닌 이제는 너무나 쉽고 편하게 그곳엘 갈 수가 있더라는.


딜쿠샤.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또는 호박목걸이로 기억되는 곳이다.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의 ' 딜쿠샤'

미국기자인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실던  집의 이름이다.

1923년 지어지기 시작해서 1924년 완공되었고, 1926년 화재로 1930년에 재건되었다.

일제 강점기 1942년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후에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이후 2005년 브루스 테일러가 어린 시절 살던 딜쿠샤를 찾으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서울시는 딜쿠샤의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고 훼손된 원형으로 복원하기 위해 2016년 관련 기관과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당시의 모습으로 전체가 공개된 것은  2021년 3월이다.

내부 촬영은 금지였다.


앨버트는 거주동안 운산. 직산 금광에서 일하고 음첨골금광을 경영했다.

테일러 가족은 한국에서 거주하는 동안 금강산을 여행했고 , ( 부인 영국 연극배우 출신 메리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 여름에는 강원도 원산 갈마해변과 화진포에서 휴가도 즐겼다

 또한 경성에서 가주하는 외국인들과 다양한 친목모임을 가졌다.


앨버트와 메리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 만났고 앨버트는 그녀에게 호박목걸이를  청혼의 선물로 건넸다. 그래서 딜쿠샤가 호박목걸이로 상징되기도 한다 (그녀의 저서 제목 역시  '호박목걸이'이다. )


내부의 1.2 층거실엔 한국의 수가 놓아진 병풍부터 시작하여 가구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집사 역할을 한 한국인 김주사의 초상을 메리가 그렸는데 그 초상화가 얼마나 세밀하고 정교하던지  한참을 서있었다.


한국애서 AP통산원으로 활동한 앨버트는 1919년 2월 28일, 우연히 독립산 언서를 발견하고 3-1, 우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실리면서 한국의 식민지배 현실과 독립선언이 세계에 알려질 수 있기도 했다. 또한 고종 국장 행렬을 촬영하고 제암리 학살사건도 보도하여 한국에 우호적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테일러부부도 강제추방되었다.

앨버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려 노력했으나 1948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메리는 앨버트의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묻어주기 위해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그녀의 딸 부르스 테일러와 손녀 제니퍼 테일러가 딜쿠샤 관련 많은 유물을 기증해서 복원된 그 곳엔 역사적 유물들이 가득 찼다.

늦가을 햇살 좋은 날   노오란 은향나무 고목 아래에서 딜쿠샤 건물을 바리 보길 권해본다.


돌아오는 길은 인왕산쪽 성곽으로 올라가 길 따라 내려가다보면 루프탑 카페가 보인다.

그 곳에서 잠시 창밖이나 루프탑에서 인왕산을 바리보아도 좋을것이다


살포시 그 앞의 홍난파 가옥도 남겨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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