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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Jun 12. 2024

외가의 추억

저 처음으로 할머니 됐어요!

저 할머니 됐어요.


첫 손주가 저랑 같은 청용띠로  어제 오후(6월 5일) 4시 15분에 다엘이가 태어났어요!

34주 동안 밝게 힘든 몸을 견뎌준 큰 며늘아가에게 고마움을 전해봅니다.

빠른 회복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엘 아빠가 된 장남에게 정성껏 가족을 섬기라고 당부도 남겨봅니다..

더불어 아빠 된 것도 축하해요!


실은 6월 초가 친정아버지 기일이라 전 더 많은 생각이 교차하네요.

할머니가 됐으니 , 육적, 영적으로 저도 더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빠처럼 3.1킬로!

하루 만에 겨우 눈 뜬 얼굴도 보임.

다니엘의 하나님이란 의미의 손주 이름은 이다엘'


(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제국 바빌로니아에 끌려갔지만, 총명함으로 왕의 조언자이자 고위 관리직까지 올라갔음. 또 총명한 친구들이 많았고, 본인이 사자굴에 던져졌어도 보호하심으로 살아남음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이라는 뜻입니다. 남자가 되길 기도해 봅니다. protection of God.


1. 총명하게 (어떤 환경에서도) 큰일을 하는 사람

2. 좋은 의미에서의 유유상종,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사람

3.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의 신념 신앙을 지키고 또 보호받는 사람)


무럭무럭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이거 70년 대사 맞?)


어제 든 또 다른 생각하나는 나의 엄마가 첫 손주를 만나시던 때가 남편을 먼저 보내시고 5개월이 지난 늦가을, 당시 엄마의 연세가 정확히 58세셨지...

혼자서 유도분만하러 들어간 딸의 상태를 온전히 견뎌내셨구나 싶은 생각이 처음 들었었다.

나는 물론 시어머니지만,

어제 오후 내내  큰 며늘아가가 걱정되어  긴장을 늦 수가  없었다..

경험만큼 내 엄마의 경험의 무게가 느껴지는구나 싶은  오늘이다.

큰 며늘아가는 처음부터 자녀 3명을 낫고 싶어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2명은 좀 아쉽고, 어려서 오빠 둘밑의 늦둥이 딸로 태어난 그녀는, 3명이 지냈던 어린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혼인예배를 올린 지 일 년 반이 지나  첫아이 계획에 돌입했던 장남부부, 공교롭게 작년 추석즈음 친정부모님, 오빠들과 떠났던 제주도 세계 열방기도회에서  떠억  아가가 생겼다는!

그 사이에 새롭게 이제야 진짜 신혼보금자리를 찾는 일부터  이사까지 있었지만 , 항상 밝은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였다.


임신 초기  혈압이 좀 높아서 내심 걱정을 했었지만 모든 것은 주님께서 온전히 주관하시리라 믿고, 기도하며 지난달엔 가족모임으로 집에서 돼지갈비를 포함해  해산 전의 음식들을 챙겨 먹기도 했었다.

입덧도 없이 씩씩하게 출근하던 그녀가 어느 날 저녁 전화가 왔다.

'어머니, 심심해서 밤마실 갈까 하는데 두 분 안 피곤 하시면 시댁으로 갈까 해요 ' 하고 전화가..

그렇게 무거운 몸을 끌고 , 밤마실을 한 시간 거리를 걸려 시댁으로 오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예쁘던지요.

망고빙수를 주문해 놓고, 혹시나 몰라 빠르게 집의 재료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더니 또 얼마나 잘 먹던지요...


그렇게 헤어지고 2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정확히는 6월 5일 아침이었다 )

일본사진작가님의 예쁜 어린아이들과 수국의 사진이 보여서 큰 아가에게  태교에 좋을 것 같다고 보내준 뒤에, 얼핏 인스타에 병원사진이 스쳐 지나길래 장남한테 카톡을 남겼었다.

34주 차의 그녀가  혈압이 높아지니 갑자기 주치샘께서 두 시간 안에 수술여부를 정하신다 뵀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그때부터 두 손 모아 기도만 할 수 있었다.

항상 걱정은 뒤로 버리라시는 그분께서 모든 일정에 함께 해 주실 것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는 ,

그렇게 큰 아가는 급하게 수술실로 향한듯했고, 나는 진짜 솔직히 손주보다 며늘아가의 건강과 수술과정이 염려되어 가슴이 타들어가던 시간  

내 엄마가 남편을 여의시고 5개월 만이던 91년 11월, 엄마는 고작 57세였다는 사실을 피부로 인지 버렸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막둥이인 따님의 갑작스러운 슈술 소식에 친정부모님은 어떠셨을까 싶은 생각이  가득 들었던 그날이었다.


4시 15분이란 기럭이 적힌 첫 손주의 사진을 아들이 보내오며 적어 보내길  , '아들을 보니 웃음이 나고요 , 아직 수술마무리 중인 아내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네요.'(우리 집 어록으로 간직하기로^^)


큰 아가가 회복실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았던  그날이다.

그렇게 자연분만을 원하고 모유수유를 원하던 며늘아가였지만 올라가는 혈압에 주치샘께서 정하신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그렇게 마무리를 짓던 초저녁에 안사돈께 전화를 먼저 드렸다.

축하합니다 하시는 가라앉은 음성에  , 내가 먼저  얼마나 마음 졸이셨을지 손주보다 며늘아가 회복이 먼저라고 진심을 담아 대화를 나눴었다.

재왕이라 5박 6일간 남편의 간병 외엔 면회도 불가했던 며칠이 지나고  월요일 퇴원날 병원 로비에  오랜만에 바깥시돈들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먼 길을 올라오시는 친정어머님, 더운 날이라 음식을 내가 챙기겠다고 아들에게 이야길 전했었고(산후조리원을 마다하고 집에서 몸조리를 하겠다고 산후조리살 부른 며늘아사의 여로 깊은 마음이 헤아려져서 ), 일요일저녁에 바쁘게 저염식으로 미역국과 나물, 버섯볶음, 당일아침에 잡곡밥과 갈치를 구워 챙겨 들고  첫 손주와의 첫 만남에 설레기도 했었다

그녀의 친정아버님께서 목사님이셔서 축복기도를 해주셨고,

처음으로 아들을 안아보며 무척 떨린다는 장남  그리고 양가 기족들과 기념사진도 찍던 훈훈한 시간이었다.


친정어마의 손길도 마다하고 씩씩한 그녀는 다음날부터 신후 조리사가 오시니 퇴원날 오후부터 밤은 오롯이 셋이 지내겠다고 의사표시를 했었기에 (난 항상 그녀에 개 그대가 가장 편힌 방법으로 하게나  하던 차라) 양가부모님들은 섭섭함도, 걱정도 뒤로 미루고 배웅을 했었다.

오랜만의 해후라 점심 식사를 미리 예약해 두었었고  이런저런 서로에게 축하를 보내며 식사를 마치고 , 그녀의 큰오빠와 두 분은 유성으로 내려가셨다


내가 큰아이를 분만히던날들이 떠올랐었다.

구렁이 몽을 쑤어주신 내 아빠는 내가 임신 5개월이던 91년 6월 4일에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하셨었다.

큰아이가 태어나고 눈매도, 태어난 띠도 아빠와 같은 양해였어서, 분만실서 아가의 울음소리에난 실은, 내 아빠가 생각나 울어버렸었고, 주지의도 간호사도  아들인데 왜 우냐고 말하시던 그 시간이 생생하게 말이다.


이제 큰아들내외는 진짜 부모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언제고 힘들 땐 SOS를 하거라 했고, 해줄 일은 실은 기도뿐일 것이다.

그 며늘아가가 하루를 온전히 셋이 보낸 다음날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남편이 주님께서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인도하시니 믿고 두려워말라라고 말이다.

항상 자식은 부모가 다 알지 못한다.

이번에 보니 내 아들이 내 생각보다 더 의젓하구나 라는 사실을 피부로 체감했다.

또 감사의 인사를 못했다고 정중히 인사까지 전하던 이제는 다엘엄마에게 , 내가 당부의 말을 건넸다.

아가의 울음을 겁내지 말고, 혹여라도 피가 나도 두려워말라고 말이다.

(예전 내가 엄마가 됐을 때  의사이던 남동생이 내게 해준 말이었다 )

신생아인 다엘이 와의 전쟁은 아직 시작도 전이지 싶다.

뒤집기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시작일터.. 장남을 닮 있으면 진짜 울음 끝도 짧을 텐데.... 하며  우리 부부는 매일 보내오는 첫 손주의 사진과 영상만 들여다보고 있다.

나와 60년 차이의 같은 청용띠 디엘아!

아프지 말고 무럭무럭 자라주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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