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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Chae Apr 11. 2020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큐레이터, 드리스켈을 추모하며

4월 둘째 주

원문 기사:

How Late Curator and Artist David C. Driskell Changed Art History Forever by Pamela Newkirk, ARTnews, April 10 2020

https://www.artnews.com/art-news/news/pamela-newkirk-david-driskell-rememberance-1202683648/



스튜디오에서 데이비드 C. 드리스켈. 사진 Lyle Ashton Harris. 2015.


파멜라 뉴커크(Pamela Newkirk)는 뉴욕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며, <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와 <Diversity Inc: The Failed Promise of a Billion-Dollar Business>의 저자이다. 현재 큐레이터, 학자, 아티스트이자 컬렉터였던 데이비드 C. 드리스켈(David C. Driskell)의 전기를 쓰고 있다.


1976년에 나온 아카이브 영화에는 그의 기념비적인 전시가 된 ≪Two Centuries of Black American Art, 1750-1950≫(로스앤젤레스 주립 미술관)에 한창 몰두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 C. 드리스켈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전시에서는 200점이 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의 회화, 드로잉, 조각 작품이 전시되었고, 메이저급 미술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 미술을 가장 포괄적으로 망라한 컬렉션이 되었다. 당시 함께 발간된 도록은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드리스켈은 이 전시를 통해 흑인 미술 분야에서 전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학자가 되었고, 수많은 전시를 기획하고 컬렉터들에게 조언하며 세계 여러 미술 기관들의 수장고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드리스켈과 나는 그의 생애를 담은 책을 함께 쓰기로 했고, 지난 몇 년간 그는 내게 앞서 언급한 영화를 포함해 기사와 강연 자료, 라디오 인터뷰, 카탈로그, 사진 등의 아카이브 자료들을 보내왔다.


조지아 주의 이턴튼과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애팔라치아 산맥의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70년에 걸친 세월 동안 유명한 예술가, 큐레이터, 컬렉터, 스승, 학자, 멘토로서 예술계에서 활약한 그의 삶이 아카이브 자료에 담겨있었다.


드리스켈은 명예 박사 학위를 비롯해,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2000년), 내셔널 아카데미시안 선출(2006년), 미국 예술 과학 협회(American Academy of Arts & Sciences) 입회(2018년), 아틀란타 하이 뮤지엄 오브 아트(the High Museum of Art in Atlanta)에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 그가 명예 교수이자 예술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던(1978–83년) 메릴랜드 대학에 그의 이름을 딴 센터 설립 등 수많은 영예를 얻었다. 1995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영부인의 초청으로 백악관에 영구 전시되는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의 작품을 선정하기도 했다. 그가 선정한 헨리 오사와 태너(Henry Ossawa Tanner)의 작품 <Sand Dunes at Sunset: Atlantic City>(1885)는 1996년에 백악관 그린룸(Green Room)에서 공개되었다.


데이비드 C. 드리스켈. 사진 Lyle Ashton Harris. 2015.


드리스켈은 2016년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사진학자 데보라 윌리스(Deborah Willis)가 설립한 제3회 흑인 초상 컨퍼런스(the Black Portraiture[s] III conference)에서 내게 그의 생애를 집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꺼냈다. 그가 평생 이룬 업적과 유산에 비해 매우 겸허한 부탁이었다. 


그는 하워드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예술학자이자 교수였던 제임스 포터(James Porter)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포터 교수는 드리스켈에게 “우리가 이룩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포터 교수 외에도 예술가 로이스 말리우 존스(Loïs Maliou Jones), 알랭 로크(Alain Locke), 예술대학 학장이었던 제임스 V. 헤링(James V. Herring) 역시 드리스켈에게 카탈로그를 만들고, 컬렉팅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1990년대 말에 기자로서 드리스켈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 내 관심사가 아프리카계 미국 미술에 쏠려있을 때였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포스트-블랙(post-black)” 미술에 대한 동시대적 논의를 다룬 석사 논문을 쓸 때, 그리고 후에 아트뉴스에 그에 관한 일련의 기사를 기고할 때, 도저히 드리스켈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9년 메릴랜드 하얏트빌에 있는 그의 고풍스러운 빅토리아풍 저택에 방문했을 때, 드리스켈은 68년간 함께한 아내 델마(Thelma)와 살고 있었다. 꽃과 허브와 채소로 풍성한 정원 속에 그의 목재로 지어진 이층 짜리 스튜디오가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고, 아프리카 조각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거장 작가들의 작품으로 가득한 집이 있었다.


“내가 알던 예술가들은 미국 사회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었죠.” 그가 회상했다. “주류 예술가들과 똑같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지만 아무리 잘해도 ‘흑인 작가’로만 보여질 뿐이었습니다.”


테네시 주의 피스크 대학(Fisk University)에서 대학 미술관의 관장이자 예술대학 학장으로 있었던 1967~1977년 사이에, 드리스켈은 그때껏 저평가되어왔던 수많은 거장들을 조명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제이콥 로렌스, 알마 토마스, 로메어 비어든, 윌리엄 H. 존슨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도록 에세이를 썼다. 대부분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이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학생들의 작품으로 구성된 방대한 컬렉션은 1998년부터 2001년 사이에 아틀란타, 샌프란시스코, 뉴왁, 그리고 메릴랜드의 컬리지 파크까지 전국을 순회했다.


그 와중에 드리스켈 역시 목사의 아들로서 성경, 아프리카 부족 미술, 자연에 영감을 받은 밝은 색채의 유화와 과슈 페인팅, 콜라주, 판화 작품을 제작했다(정원을 가꾸고 퀼트를 제작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작품 또한 아프리카계 미국 미술 순회전에 포함됐다. 그가 1955년에 교수 일을 시작한 알라바마의 탈라데가 대학(Talladega College)의 디포레스트 채플(DeForest Chapel)과 그가 예배를 드렸던 워싱턴 D.C.의 연합 그리스도 교회에는 그가 그린 흑인의 얼굴이 창문의 스테인글라스를 장식하고 있다.


데이비드 C. 드리스켈. 사진 Lyle Ashton Harris. 2015.


나는 최근 몇 년간 80대의 말쑥한 드리스켈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자신의 아늑한 집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작품 활동과 학계 활동을 위해 전세계를 쏘다니는 모습에 그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는 소장하고 있던 칸딘스키의 판화 작품을 팔아 1961년에 그 집을 샀다. 아내와 두 딸의 도움을 받아 한층 한층 쌓아올린 건물은 빛이 가득하고 천장이 아주 높은 스튜디오가 되었다. “천국 같죠. 집을 떠나서도 이 집이 나오는 꿈을 꿉니다.”


그의 박식함의 엿보이는 이야기 속엔 미술계 전설들의 우화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 나는 금방 대화에 푹 빠져들었다. 그는 생동감 넘치는 스케치로 기록한 여행기와,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휘갈겨 쓴 간명한 이메일들도 함께 보여줬다. 그는 2017년에 이렇게 썼다. “별탈 없이 집에 도착했고 이제는 쉬어야 할 때다. 토요일에 메인 주 로클랜드에 있는 미술관에서 열리는 내 판화 전시에 간다.”


몇 달 후 7월, 그는 자신이 도록 에세이를 쓴 ≪Soul of a Nation: Art in the Age of Black Power≫ 전시를 보기위해 런던 테이트 미술관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여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려서 하고 싶었던 일들의 반의 반도 이루지 못했어. 여행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스튜디오에 있지를 못했네. 연락하며 지내자. -데이비드.” 


그 가을, 책의 개요를 짜기 위해 그와 다시 연락했을 때 여전히 그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아티스트 토크를 하는 등 여러 일로 바빴다. “지난 몇 년간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한 다양한 활동을 언급하며 내 삶의 이야기를 큐레이팅한다는, 당신의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가 할 이야기를 진전시켜나갈 접근 방식을 찾은 것 같아요.”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가 받아야 할 인정과 강연, 인터뷰, 전시 의뢰는 아마 끝도 없겠지만, 그는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그렇게나 많은 업적을 쌓은 이후에도, 여전히 쉬지 않고 목표와 꿈을 향해 달렸다. 회화와 판화 작업 전시도 계속했는데 곧 메인 현대미술 센터(the Center for Maine Contemporary Art)와 뉴욕 DC 무어 갤러리(the DC Moore gallery in New York)에서 그의 회고전이 예정되어있다.


“내 회고전이 열릴 곳이 이제 정해지고 있다.” 그는 2018년에 이렇게 썼다. “잘하면 3년 후, 내가 90대가 되는 2021년 봄에는 하이 뮤지엄에서, 여름에는 포틀랜드 뮤지엄에서, 겨울에는 마이애미의 페레즈 미술관에서, 그리고 2022년 봄에는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미술관에서 열릴 것 같다.”


그는 또 친구들과 멘티들을 위해 추천서를 쓰거나, 전시 오프닝에 참석하거나, 사적인 모임을 가지는 데에도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2014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캐리 메이 윔스(Carrie Mae Weems) 전시 오프닝에 잘 빼입은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 열린 내 책 사인회에도 참석했고, 바로 지난 2월, 뉴욕의 너친 갤러리에서 열린 메리 러브레이스 오닐(Mary Lovelace O’Neal)의 개인전에도 모습을 보였다.


“그 사람, 그 생애, 그리고 그의 업적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윔스는 드리스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이메일에 이렇게 썼다.


매 봄마다 자택에서 드리스켈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할 만큼 그와 친한 사이였던 컬렉터 브렌다 톰슨(Brenda Thompson)은 “그는 친구를 위해 시간을 쓰는 사람이었어요.”라며 회고했다.


몇 주전에 톰슨은 그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조심하라고 말하며 봄마다 열리는 식사 초대를 연기했지만, 결국 드리스켈이 89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톰슨은 몇 달 전 조지아 씨아일랜드에서 남편 래리와 드리스켈 가족과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에 대해 “우리는 중요한 아티스트들의 작업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한 시간 후에는 드리스켈이 가꾼 정원과 직접 만든 과일청에 대해 떠들고 있었죠.”라며 덧붙였다. “그 후에 정말로 과일청이 담긴 단지 몇 개를 보내주더군요.”


드리스켈의 생애는 아름다움과 감사와 축복으로 가득한, 원대하고 관대하며 목적이 있는 삶이었다. 1999년에 나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특유의 침착한 어조로, “처음부터 다시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아트뉴스 2000년 5월호에 실린 기사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했다. “예술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인생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각적 움직임이지요. 예술과 함께한 것은 내게 축복이었습니다.” 


파멜라 뉴커크 Pamela Newkirk



Emily's Comment:

지난 4월 1일 코로나19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C. 드리스켈(1931-2020)에 대해 그의 전기 작가인 파멜라 뉴커크가 회고하는 내용을 담은 기사입니다. 드리스켈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프리카계 미국 작가들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었을지 상상이 불가할 정도로 그는 예술사상 중요한 학자였습니다. 또한 그 자신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작가이자, 컬렉터이기도 했지요. 9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미술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실천하면서도 가정과 친구들과 소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그의 삶을 돌아보며, 목적이 이끄는 삶, 그럼에도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번역/ Emily C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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