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의 만남(contact)” – 중세인과 미술 이야기
신, 즉 그리스도교의 신은 중세인들에게 삶의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들의 거의 모든 미술은 신과 종교로 향했고, 그래서 중세는 ‘암흑기’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신을 중심으로 한 중세 미술이 마냥 엄숙하고 경직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술로써 ‘신과의 만남’을 간절히 추구했던 중세인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생동감 넘치고 다채로운 미술을 만들어냈다.
여기, 흙과 돌이 담긴 한 상자가 있다. 6-7세기 경에 만들어진 <목조 성유물함>은 우리 눈에 평범해보일지라도 중세인들에게는 특별한 물건이다. 신심 가득한 중세인들은 교통이 불편한 시대에 오랜 길을 걸어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했다. 그리고 성스러운 순례지의 흙과 돌을 주워 와서 그 위에 순례지를 다녀온 날짜를 기록했다. 그 흙과 돌은 아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최고의 기념품이었으리라. 순례자들은 흙을 상자에 고이 담아 성경의 내용으로 상자를 장식했다. 그림 속 이야기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전개된다. 예수가 태어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다시 부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특이한 점은 이 그림 장식이 상자의 뚜껑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상자는 대부분 닫아 두었을 텐데,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뚜껑을 닫았을 때 그림이 흙과 닿는 것을 의도하였기 때문이다. 순례지에서 가져온 흙의 신성함이 그림에 전이되고, 그 그림을 보는 감상자 역시 그 힘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처럼 신, 혹은 신성성과의 ‘접촉’은 중세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키워드였다.
신과 가까이하고자 한 중세인의 욕망은 ‘이콘(숭배 이미지)’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콘 숭배 전통은 예수나 성인들의 초상화를 가까이 두고 보며 만지는 등 숭배한 것을 가리킨다. 이 전통은 가정 내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로 여성 신자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림을 신처럼 여긴다는 점에서 이콘은 우상 숭배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8-9세기에는 이러한 우상 제작을 금지하며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에 반발한 이들은 이콘이 사람의 손이 아닌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쳤다. <수다리움을 든 성녀 베로니카와 성인들>은 당시 주요 이콘 중 하나였던 ‘수다리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 언덕으로 올라갈 때 옆에 있던 성녀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의 땀을 닦아주었는데, 수다리움은 그때 수건에 새겨진 얼굴의 이미지를 가리킨다. 우리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사람들은 신성한 힘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특별한 축일에만 성직자가 이 수다리움의 이미지를 꺼내어 신자들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신성함에 감복한 신자들이 계속 만지거나 키스해서 이미지가 훼손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중세의 대중들이 신과의 ‘버라이어티’한 만남을 원했으니, 교회도 신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시각적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따라서 비잔틴 교회는 다양한 미디어,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하나의 종합 예술을 신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했다. 그리스의 도르미티온 교회로 가보자. 비잔틴 중기에 만들어진 이 교회의 중앙돔에는 거대한 예수의 반신상이 그려져 있다. 왼손에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는 예수의 반신상(판토크라토르)은 당시 어느 교회의 중앙돔에나 똑같이 그려졌다. 바로 그 돔 아래에서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었는데, 예수의 몸을 의미하는 빵,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먹는 것은 신과 자신의 몸이 합일되는 경험과 다름없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거대한 예수가 자신을 굽어보고 있다. 이는 신의 영역에 들어왔음을 체험하는 감동적인 일이었다. 또한 예수 주변에는 ‘수태고지’, ‘예수의 탄생’, ‘예수의 세례’, ‘성변용’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신자들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실감날 수 있었던 이유는, 움푹 패인 화면 양쪽에 그려진 인물들이 구부러진 공간에서 ‘실제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잔틴 교회의 여러 장치들은 신자들이 예수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체험하고 느끼며 신심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보는 것’의 중요성은 북유럽의 중세인들에게도 유효했다. <성 그레고리우스의 미사>는 15세기 북유럽에서 유행했던 도상이다. 이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성 그레고리우스의 미사 장면, 즉 그레고리우스가 빵과 포도주를 높이 들어올리자 그것이 예수로 성변화(Transubstantiation)했다는 이야기를 시각화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보면 사후에 지옥과 천국 사이 ‘연옥’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73년에 그려진 소에스트 성모교회의 <성 그레고리우스의 미사> 속에는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등을 돌려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즉 그림 속 성직자들의 시선이 이 그림을 보는 관람자와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성직자의 눈 앞에 나타나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십자가형을 당한 모습 그대로, 몸의 상처를 움켜쥔 ‘수난의 예수’의 이미지이다. 기이한 것은 예수가 마치 뒤에 있는 액자 속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수 뒤의 액자가 텅 비어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림 속에서 그림을 뚫고 나온 예수가, 자신의 눈 앞에도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감상자의 욕망을 대변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한편, 신에 대한 독실한 신심은 중세인들의 사랑과 에로티시즘 관념과 결부되어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예수의 상처에 대한 신부의 신비주의적 비전>은 132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모든 신자들을 대표하는 한 명의 신부(bride)가 예수와 마치 연인, 부부 사이처럼 다정하게 끌어안고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다. 예수와 신부의 결혼은 곧 신과 신자들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왼쪽 하단과 오른쪽 그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홀로 남겨진 여인은 창을 들고 있고, 예수는 십자가형을 당한 채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가리키고 있다. 이때 여인이 든 창의 방향이 예수의 상처 부위와 기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창은 예수를 향한 여인의 불타는 사랑을 은유하는 것이다. 여인은 신심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자신의 사랑으로 예수를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본래 종교적 수난과 고통의 상징이었던 예수의 옆구리 상처는 뜨거운 사랑의 흔적으로 그 의미가 변모하였다.
중세인과 중세 미술이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면, 오늘날 우리의 ‘팬덤 문화’를 떠올려보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열렬한 팬들은 좋아하는 가수와 ‘아이컨택’만 하여도 잠 못 이룬다. 설령 그것이 ‘직캠’ 영상을 통한 간접적인 컨택이어도 말이다. 또 스타의 포스터, 특히 친필로 싸인한 CD는 무엇보다 성스럽게 ‘모셔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중세인들의 영원한 ‘아이돌’은 명실공히 신이었다. 대상만 다를 뿐,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 중세 미술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서양 고대/중세 미술 수업 과제(대중에게 중세 미술의 매력을 어필하는 칼럼쓰기)로 쓴 글을 공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