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이 어렵나요 (3): 토니 모리슨『빌러비드』(1897)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This is not a story to pass on)’라는 문장을 세 번 반복하며 끝난다.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면서 장편소설로 탄생시켜 굳이 전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전하고 있을까.
1974년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던 모리슨은 미국 300년 동안의 노예 역사를 담은 『블랙 북』을 편집하다가 ‘마거릿 가너’ 사건을 접한다. 1856년 1월에 켄터키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는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쳐서 삼촌의 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곧 추격 중이던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들에게 포위당하고, 도망노예법에 따라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될 위기에 처했다. 그녀에게는 배 속에 있는 아기 외에도 네 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 자식을 자신처럼 평생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그녀는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리고 나머지 아이들도 죽이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마거릿 가너는 법정에 섰고 재판 과정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다름 아닌 피고인이 친자살해라는 중죄로 자신을 다스려 달라는 청원을 했기 때문이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가너의 행위는 ‘살인’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백인 소유주의 재산에 흠집을 낸 재물손괴죄를 저질렀을 뿐이었다.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서 관대한 처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는 가너의 뜻과는 달리 그녀는 결국 ‘인간’으로 재판정에 서지 못했고 끝까지 노예로 생을 마감했다.
모리슨은 가너의 실화를 바탕으로 『빌러비드』를 썼다. 1987년에 출간되어 1988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이 소설에 대해 모리슨은 ‘미국 사회 전체가 앓고 있는 기억상실증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소설은 끔찍했던 폭력의 역사를 잊고 있는 20세기의 독자를 19세기 중반 흑인 여성 노예들의 자아가 소멸된 삶 속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통에 일그러진 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리고는 가해자에게 어찌 이런 기억을 잊은 척 살고 있으며, 심지어 되풀이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124번지는 원귀로 가득 차 있었다’ 등으로 번역되는 ‘124 was spiteful’이라는 강렬한 문장과 함께 소설은 시작된다. 때는 노예 해방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난 1873년, 신시내티의 블루스톤가 124번지에 세상과의 교류가 끊어진 흑인 여성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가 살고 있다.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는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은 집을 나가 버렸다.
124번지가 유령이 출몰하는 집이 된 이유를 세서는 짐작한다. 두 살 때 죽은 딸의 원혼이 집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안고 고립과 단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서 앞에 두 명의 방문객이 연이어 등장한다. 첫 번째 방문객은 이십여 년 전 세서와 남부 농장에서 노예 생활을 함께했던 ‘폴 디’이다. ‘과거로부터 온 남자’ 폴 디로 인해 세서는 이십여 년 전의 끔찍했던 노예 생활을 떠올린다.
노예 해방령이 시행되기 전인 1850년대의 세서는 폴 디 등 다른 다섯 명의 흑인 남자 노예와 함께 켄터키의 소농장 ‘스위트홈’에서 일했던 노예였다. 비교적 관대했던 농장주인 덕분에 이들 노예의 삶은 그럭저럭 견딜만했지만, 주인이 죽은 후 ‘스쿨티쳐’와 그의 조카들이 농장의 새 관리자로 등장하면서 ‘스위트홈’은 비극의 장소가 된다. 노예들의 신체적 특징을 기록한 수첩을 들고 다니며 상품성을 평가하던 스쿨티쳐에게 있어서 흑인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나 말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베이비 석스)의 노예 문서를 없애주려고 일을 더 많이 했던 착한 남자 핼리와 결혼한 세서는 사내아이 둘과 갓 태어난 딸을 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는데, 어느 날 스쿨티쳐의 조카들로부터 성적 유린을 당한다. 이 일을 가 너부인에게 일러바쳤다는 이유로 쇠가죽 채찍으로 매질을 당한 세서의 등에는 ‘벚나무’ 모양의 흉터가 낙인처럼 남는다. 굴욕감에 시달리던 세서는 탈주를 계획하게 되고,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해방 주인 오하이오에 있던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미리 보내어 놓는다.
‘스위트홈’의 노예들도 함께 탈주를 감행하지만, 실패한 노예들의 종말은 끔찍했다. 식소는 산 채로 불에 태워졌고, 폴 디는 재갈이 물리고 굴레가 씌워졌다.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뒤로하고 세서는 홀로 탈출하여 도중에 낳은 아이인 덴버와 함께 무사히 베이비 석소의 집에 도착하지만, 불운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의 추격으로 아이들과 함께 체포될 위기에 처한다. 붙잡은 노예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도망노예법’이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던 1850년대라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히면 갈 곳이라고는 옛 주인의 끔찍한 보복이 기다리는 ‘스위트홈’밖에 없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세서는 ‘마거릿 가너’가 했던 선택을 똑같이 했다. 노예 신분의 대물림, 특히 두 살배기 딸이 여자 노예로서 겪어야 할 온갖 비극적인 일들을 이미 경험한 세서는 톱으로 ‘그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던 자들을 사랑하는 자(beloved)라 부르리라’라는 로마서 9장 25절의 말씀을 따라 아기의 묘비에 ‘빌러비드’라는 한 단어를 새겨 넣었다. 살아서 사랑받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라는 염원이 들어 있는 ‘빌러비드’. 이 한 단어는 돈이 없던 세서가 석공쟁이에게 몸을 판 대가로 새겨 넣은 것이었다.
아무리 모성애로 인해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엽기적인 친자살해를 이해해 줄 이웃은 없었다.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가 살아 있었을 때, 마을의 친교 장소이자 치유의 공간이었던 124번지는 세서가 저지른 행위로 인해 혐오 장소로 변하게 되고,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녀와 그녀의 집은 흑인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고립되었다.
그러는 동안 124번지에는 두 번째 방문객이 찾아온다. 정체불명의 아가씨는 자신의 이름을 ‘빌러비드’라고 소개하고, 그 순간 세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끔찍한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빌러비드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며 십 팔 년 전에 죽은 아이의 육화라고 생각하는 세서는 ‘내 딸, 그 애가 내게 돌아왔어’라고 말하며 빌러비드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 딸 덴버는 그런 엄마가 걱정된다. 빌러비드와 시간을 보내는 일 외에는 아무 일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엄마를 구해내기 위해 용기를 내어 세상 밖으로 나가 도움을 요청한다. 마침내 마을의 흑인 여성 삼십 명의 노랫소리가 124번지에서 빌러비드를 몰아내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모리슨이 19세기에 유행했던 고딕소설의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존재, 유령을 20세기 텍스트로 불러온 이유를 생각해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령 ‘빌러비드’는 너무 일찍 소멸해버린 어린 영혼의 화신이지만, 노예제도 아래에서 희생당한 모든 흑인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모리슨도 소설을 시작하며 ‘육천만 명 그리고 그 이상’이라고 쓰고 있다.
떠도는 육천만 명 이상의 원혼들. 이들을 잘 떠나보내려면 왜 못 떠나는지 물어보고 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해 한이 맺힌 이름, ‘빌러비드’를 마음껏 불러주고, 상처받은 마음은 위로해주어야 한다.
아슈라프 루시디(Ashraf H. A. Rushdy)는 ‘빌러비드’란 존재를 ‘잊히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는 과거가 육화된 인물이며, 제대로 묻히기 위해서 반드시 환생 돼야 하는 존재들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제대로 잊고 제대로 묻어 주기 위해서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춰내는 소설, 『빌러비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토니 모리슨이 위령의 마음을 담아 쓴 소설이다.
노예 해방령이 선포된 1863년 1월로부터 1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아직도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고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외치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노예제도가 사라져도, 세서의 등에 있는 ‘벚나무’ 모양 흉터는 그대로 남아 옛 주인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듯이, 아픈 역사의 상흔은 아직도 해결이 안 된 채 ‘빌러비드’의 원혼으로 우리 주위를 떠돈다.
‘이 나라에 죽은 검둥이의 한이 서까래까지 그득그득 쌓이지 않은 집은 한 채도 없다’라고 소설 『빌러비드』는 말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라는 독립선언문을 마음속에 품고 성장해왔다는 나라가 보여준 위선의 역사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서까래까지 쌓여 있는 한을 달래려면, 소설 속 세서와 마을 공동체가 과거를 대면하고 위로해주듯이, ‘사랑받지 못한 자’를 불러내어 사죄하고 ‘당신은 사랑받는 자’라고 마음을 다해 말해야 한다. 그래야 백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밝아오지 않는 여명’ 속에 머물러 있다는 미국 흑백 갈등 문제도 ‘내일’의 태양을 기약할 수 있게 되리라.
‘전할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를 세 번이나 말하면서 역설적으로 크게 전달해버린 이야기, 『빌러비드』. 기억상실증이라는 꾀병 속으로 ‘빌러비드’를 디밀어 넣은 채,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인 것처럼 손을 털고 있는 세상에 책임을 묻는 작가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들린다. 제도만 없앴다고 동행이 이루어졌는가.
토니 모리슨『빌러비드』(1987), (최인자 옮김, 문학동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