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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소설은 왜 읽나요 (3) : 존 윌리엄스『스토너』(1965)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사랑할 때는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에는 특이한 카메라 이동의 순간이 있다. 지인들이 모여 댄스파티를 즐기는 장면이다. 요란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사람들을 찍던 카메라가 어느 순간 밖으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멀리서 창을 통해 춤추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근접촬영이 담았던 사람들의 웃음소리, 대화 소리,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적막한 가운데 마리오네트처럼 몸을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만 창을 통해 보일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제이디 스미스의 소설 『하얀 이빨』에 나오는 말이 떠올랐다. ‘모든 순간은 두 번 일어난다. 안에서 또 밖에서!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별개의 역사다’.


만일 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으로 남긴다면 이런 투 트랙(two track) 역사 쓰기가 될 것이다. 태어나서 자라고 살다가 죽는 평범한 삶의 이야기와 자신만의 웃음과 눈물, 감동과 갈등의 순간을 담은 특별한 이야기.


미국 작가 존 윌리엄스가 1965년에 발표한 『스토너』에는 한 사람의 두 갈래 역사가 담겨 있다. 스토너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직장 생활하다가, 결혼, 이혼을 거치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평범한 삶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인생 행로를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준 특별한 이야기. 병진 되는 두 줄기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난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나온 지 반백 년이 넘은 이 소설의 ‘현재성’이다.


『스토너』가 출간된 지 오십 년이 지나서 유럽에서 재출간 되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다른 누구 못지않게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평범한’ 삶에 확대경을 대고 들여다본 ‘특별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의 ‘평범하고 풍부한 이야기’도 돌아보고,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이 소설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일생


소설의 주인공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농사일을 거들어 오고 있다. 어깨가 구부정해질 정도로 일을 많이 하던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아버지는 새로 생긴 농과대학에 가서 농사 기술을 배워오라고 말한다. 스토너는 미주리대학 농과대에 입학하고, 친척의 농장에서 일손을 보태며 힘들게 학업을 이어 나간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대학 생활을 이어 나가던 스토너에게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일이 발생한다. 필수과목으로 개설된 영문학 개론 수업에서 내재해있던 열정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언어와 문학의 힘에 매료당한 그는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고, 석박사 과정까지 마친 뒤 모교인 미주리대학에서 강사로서 첫발을 내디딘다.


스토너의 결혼생활은 실패였다. 학장의 사촌인 이디스에게 강한 애정을 느껴 결혼에까지 이르지만, 한 달도 채 안 되어서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닫는다.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힘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스토너는 그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었던 공간인 서재까지 이디스에게 빼앗긴다. 가정생활이 감옥 같은 스토너가 마음 붙일 곳은 대학 연구실과 딸 그레이스뿐이었지만, 이디스의 간섭으로 인해 딸과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진다.


학교에서의 입지도 불안하다. 학생 한 명으로 인해 동료 교수와 불화와 갈등을 겪게 된 스토너는 전공 분야 강의를 맡지 못하고 1학년 교양 영어만 가르치게 된다. 가정의 일도 직장의 일도 답답하게 막혀 있고, 그는 어느새 마흔두 살이 되어 있다.


그에게 운명처럼 또 한 번의 사랑이 찾아온다. 문학 연구의 길을 함께 가는 캐서린이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학문에 대한 열정도 되살아나고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스토너는 생각하지만, 관계의 지속이 서로에게 무엇을 잃게 할지 깨닫게 되면서 캐서린과도 이별한다.


다시 무의미한 삶으로 복귀한 스토너를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고열과 무기력함이다. 몸과 마음이 급속하게 늙어가는 스토너. 그러는 사이에 딸은 임신과 결혼을 하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사위는 전사한다. 스토너는 다시 한번 학문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병이 들고 육십오 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문학이 우리에게 하는 일


스토너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은 농과대학 공부를 포기하고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다. 대학도 부모가 가라고 해서 갔던 스토너로서는 놀라운 결정이었다. 대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아주 사소한 질문 하나였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p. 22)   

  

질문에 답을 하진 못했지만, 스토너의 마음은 새로운 감수성으로 일렁인다. 토양화학 수업 시간의 지루한 암기가 무의미하고 낯설어 보이기 시작한다. 혼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기 시작한 그의 눈앞에 고대의 헬레네와 패리스가 나타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거닌다. 인간성을 탐구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쓰는 문학이 평생 헌신할 열정의 대상이자 친구임을 알게 된 스토너는 결국 부모 몰래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게 된다.


‘문송합니다’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스토너의 선택은 순수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300년 전의 소네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셰익스피어의 목소리를 들은들 무엇에 도움이 된단 말인가. 농사 기술 하나라도 더 익혀서 가난한 부모의 농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스토너에게는 더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스토너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알게 된다. 300년 전의 기술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없는 일을 300년 전의 문학은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삶의 길목마다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보편적 실수와 갈등, 불운과 슬픔, 이별과 죽음에 대하여, 과학과 기술은 도저히 줄 수 없는 위로와 공감, 예지와 통찰의 힘을 문학은 선사한다는 사실을.


학문에 대한 스토너의 열정을 보며 누군가는 아직 잉태되지 못한, 혹은 이미 차갑게 식은 자신의 열정과 마주할 것이며, 감옥과도 같은 그의 결혼생활을 보며 누군가는 자신을 옥죄는 정신적 물리적 구속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친구의 전사 소식에도 전쟁터와 무심한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뜨겁지 않아 안전하게 사는 자신의 비굴함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야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후회하는 스토너의 ‘메멘토 모리’는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의 사람들에게 늦지 않은 반성과 각성의 순간을 가져다줄 것이다. 스토너라는 사람의 평범하고 풍부한 이야기는 이렇게 관조와 성찰의 순간들을 선물하면서 오랫동안 우리를 소설 속에 붙잡아두는 힘을 가진다.    


▫️평범하고 풍부하게


‘스토너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라고 했던 슬론 교수의 질문은 셰익스피어 소네트 #73에 관한 것이었다. 소설 『스토너』는 인생의 겨울, 황혼과 죽음, 곧 소멸할 것들을 향한 애잔함을 노래하는 이 14행 시의 확장판이다. 소네트의 첫 행,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처럼, 스토너의 인생 이야기는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운명의 계절들을 앞당겨 보여주는 예습서가 되고, 삶을 인내하고 죽음을 수용할 힘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인생 상담사가 되어 준다. 불행과 좌절은 모든 삶의 이면에 들러붙어 있는 보너스 상품이니, 혼자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위로도 해주고, 결국엔 공평하게 ‘죽음의 침상’에 모두 눕게 될 것이라고 살짝 귀띔도 해 준다.


하지만 이 모든 인생 기본값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는 스토너처럼 우리만의 풍부하고 특별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는 고정된 챕터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삶의 상수들이 아니라 변수들임도 알게 된다. 스토너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안과 밖에서’ 동시 촬영한 존 윌리엄스 덕분이다.     


▫️목소리가 들리는가?      


셰익스피어와 존 윌리엄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살았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작품은 동서를 아우르는 보편성과 고금을 아우르는 수직성을 갖고,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을 선물해 주고 있다. 이것이 문학이 갖는 힘이며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할 이유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 스토너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가 쓴 책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그 책이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님을 느끼며 세상을 떠난다. 그가 떠나고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진 것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책이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책. 16세기 후반에 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20세기를 살다 간 스토너의 인생 항로를 바꿔 놓았듯이, 스토너는 떠나도 그의 책은 호흡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토너 같은 독자를 만나면 생생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리라. ‘독자여,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존 윌리엄스『스토너』(1965), (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6) 스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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