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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Dec 21. 2022

우리의 기억은 편집 모드

당신의 기억은 안녕한가요 (1) : 들어가는 말

우리의 기억은 편집 모드


대니얼 J. 레비틴이 쓴 『정리하는 뇌』는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 9.11 테러에 관한 설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응답자들은 그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었으며 누구와 대화했는지 잘 기억했다. 레비틴은 그 이유를 ‘감정적 꼬리표’에서 찾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언가가 우리를 몹시 두렵게 하거나, 화가 나게 하거나, 충격으로 몰아넣을 때, 우리 뇌는 그 경험에 ‘중요’라고 적어 놓는 신경 화학적 꼬리표를 붙인다. 마치 책을 읽을 때 마음에 와닿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형광펜으로 표시해두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감정이 섞인 기억은 나중에 그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 검색이 빨리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성은 또 다른 문제라고 레비틴은 말한다. 테러 관련 설문 응답자들은 9월 11일에 첫 번째 비행기가 노스타워와 충돌하고 약 20분 후에 두 번째 비행기가 사우스타워와 충돌하는 영상을 TV에서 본 기억이 난다고 답했는데, 이 기억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충돌 영상은 당일에 방송되었지만, 첫 번째 노스타워 영상은 당일 입수되지 않아 그다음 날인 12일에야 방송으로 나갔다고 한다. 왜 이런 기억의 오류가 발생했는가에 대해 레비틴은 충돌이 발생한 순서대로 기억의 ‘재배치’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빌 브라이슨이 쓴 『바디: 우리 몸 안내서』는 이런 기억의 재배치 현상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브라이슨에 따르면 우리는 기억의 구성 요소들-이름, 얼굴, 장소, 맥락, 촉감을 따로따로 해체해서 뇌의 서로 다른 곳으로 보내고, 전체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을 때면 그것들을 불러내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다른 외부의 자극이 주어지면 기억의 조각들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 다니며 서로 섞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브라이슨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옮겨 본다. “위키피디아 페이지와 비슷해요. 당신은 그 사이트에 가서 수정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남들도 그럴 수 있지요.”


위키피디아 페이지 수정하듯이 기억을 다시 쓰다니. 인간의 기억이 편집모드 상태라는 관점이 신선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부정확하고 왜곡된 기억으로 인해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지속된다면, 그 기억은 누가 바로 잡아 줄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과신하고 남의 기억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기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상충하는 남의 기억은 보충제가 아니라 공격 대상이 된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자신의 기억이 옳다고 우긴 적이 우리에게 한두 번씩은 있지 않을까.


기억의 왜곡도 문제지만,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더 큰 문제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를 앓고 있는 연쇄살인범 김병수의 기억을 따라간다.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저지르며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하는 김병수와 그의 딸을 노리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의 대결 구도가 긴장감을 주는 소설이다. 혼란의 결말은 접어두고라도 연쇄살인범 같은 악한이 자신이 저지른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없는 한 그는 최소한 그 자신에게는 연쇄살인범이 아니지 않을까.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이 우리의 뇌이고, 우리의 뇌가 바로 우리 자신,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소개할 소설 두 편은 인간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사소하게 어긋난 기억이 비극을 몰고 오고, 잃어가는 기억이 일상에 큰 균열을 가져온다. 기억이란 추상적 개념이지만 그 저장고는 우리에게 있다. 오늘도 우리의 ‘므네모시네(기억의 여신)’가 안녕하기를 빌어본다.    기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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