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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워블리 다리 위에 서 있는 기억들

당신의 기억은 안녕한가요 (2) : 줄리언 반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워블리 다리 위에 서 있는 기억들


▫️자기 구원의 서사


불안정하고 왜곡되기 쉬운 기억을 원상으로 완벽하게 복원해 낼 수는 없을까. 테드 창의 소설집 『숨』에 실린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라는 단편에는 이 문제를 해결한 미래 사회가 등장한다. ‘리멤(Remem)’이라는 기억 보조장치 덕분이다. 리멤은 개개인의 삶 전체를 영상으로 기록해두는 라이프로그 시스템으로서, 검색을 통해 과거의 장면들을 재생해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완벽한 개인 역사 소장용 디지털 아카이브다. 리멤이 있는 한 ‘오래되어 기억이 나질 않는군’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도 리멤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가 집을 나간 뒤 사춘기의 딸이 “엄마가 누구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해?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라고 퍼부은 말이 오래도록 그에게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리멤으로 재생해보니 정작 그 말은 자신이 딸에게 화를 내며 내뱉은 말이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딸이었다.테드 창은 이 소설에서 개인의 역사는 ‘사적인 구전 문화’의 영역이며, 각자의 기억은 ‘자기 구원의 서사’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낸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숨』, p. 301)     


‘자기 구원의 서사’는 본질적으로 취약하다. 반박의 증거물이 되는 자료들,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기억의 등장만으로도 충분히 신뢰도가 떨어진다. 테드 창의 미래 세상이 기억을 보완하고 교정하는 장치로 리멤을 가지고 있다면, 과거의 우리에게는 편지와 일기가 있었다. 지금부터 만나 볼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편지 한 통이 무너뜨린 기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비극적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일기장과 편지


40년 만에 재회한 남녀가 있다.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토니와 베로니카다. 짧았던 둘의 관계가 끝나고 베로니카가 토니의 친구였던 에이드리언과 만나게 된 뒤로 둘은 만난 적이 없었다. 이들을 40년 만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베로니카의 엄마인 사라가 죽으면서 그녀가 갖고 있던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토니에게 남긴다는 편지 때문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왜 사라가? 또 그 일기장을 왜 나에게? 라는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 토니는 수소문 끝에 베로니카가 그 일기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 그렇게 둘의 재회는 이루어진다.


다시 만난 베로니카가 토니에게 건네준 것은 몇 쪽 안 되는 분량의 일기 사본과 오래된 편지 한 통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일기는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에서 느닷없이 끝나고 있었고, 편지는 토니도 잘 기억하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었음을 알리는 편지에 대해 자신이 쓴 답신이었기 때문이다.

     

▫️책임의 사슬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던 이 두 개의 문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베로니카가 그것들을 건네준 의미를 깨닫는 순간 ‘나는 책임의 사슬을 보았다’라고 토니는 통탄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도 ‘책임’을 말하며 끝난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이별 후 수십 년을 접점 없이 살아온 토니와 베로니카. 토니를 옭아매기 시작한 ‘책임의 사슬’은 도대체 무엇일까.


토니와 헤어진 후 베로니카의 삶은 불행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엄마가 에이드리언의 아이를 낳았고, 에이드리언은 자살했다. 노산을 견딘 아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고, 베로니카가 그 아이를 죽은 엄마 대신 평생 돌보며 살아왔다.


베로니카의 연쇄적 불행은 얼핏 보면 토니와는 무관한 그녀만의 비극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문서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토니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쓴 편지 한 통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에이드리언에게 쓴 그의 편지는, 그가 기억하는 한, 새로 연인이 된 두 사람을 축복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서간체로 쓴 점잖은 글이었다.      


이십일 일자로 온 자네의 서신을 수령하면서,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시하고자 상찬과 기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네, 벗이여. (p. 77)


그런데 베로니카가 건네준 원본 편지는 차마 그 자신이 직접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속한 욕설과 저주, 그리고 악담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극의 결정적 도화선이 될 권고를 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한없이 빠져든 나머지 서로에게 해가 되는 일도 영원히 지속되길. 사실 마음 한편으론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그 여자 어머니까지도 나에게 자기 딸을 경계하라 주의를 줬었지. 내가 너라면, ‘모친’에게 이런 사실들을 확인해볼걸? 오래전에 그 여자가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물론 베로니카 몰래 해야겠지. (p.p.165~166)     


기억이 틀려도 한참 틀렸음을 보여주는 원본 편지. 토니가 자신의 기억을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며’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비극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불행히도 그가 편지에서 퍼부었던 저주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현실이 되고 있었다. 토니는 아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홧김에 해버린 자기 말을 따라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의 엄마를 정말 찾아가리라고는. 성적으로 분방한 사라가 설마 딸의 애인을 유혹하리라고는. 그리고 자신이 내뿜은 저주의 말들이 도미노처럼 비극의 문들을 연쇄적으로 열리라고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하기 전에 일기장에 쓴 가정문, ‘그래서 만약 토니가’ 다음에 이어질 말은 ‘그런 편지를 나에게 보내지 않았더라면’이었을까. 아니면 ‘베로니카의 엄마를 찾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이었을까.      


▫️워블리 다리 위의 기억


건축가처럼 정교한 설계를 통해 소설을 구상하고 쓴다는 줄리언 반스가 두 개의 문서를 주고받는 재회 장소로 설정한 곳은 카페나 펍이 아닌 ‘워블리 다리 중간’이다. 먼저 도착해서 베로니카를 기다리던 토니는 ‘베로니카가 다리의 어느 방향에서 올지도 궁금했다’라고 말한다. 템스강을 가로지르며 길게 뻗어 있는 다리 위를 걷는 사람들은, 걸어오는 방향에 따라 다른 풍경을 마주할 것이다.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에 따라 잔물결의 방향도 달리 보일 것이고 마주치는 사람도 다를 것이다. 다리 중간에서 만나서 도중에 그들이 본 것을 말한다면 분명히 같은 장소,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토니와 베로니카처럼.


‘워블리(wobbly)’는 ‘흔들리는, 불안정한’이라는 뜻이 있다. 토니는 ‘우리가 딛고 선 지반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가끔이나마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다리의 흔들림이 좋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토니의 말대로 약한 지반 위에 서 있다. 워블리 다리처럼 흔들리고 불안정하다. 어떤 기억은 없었던 일처럼 가라앉기도 하고, 없던 일이 있었던 일로 둔갑하기도 한다. 화려한 색이 흑백이 되기도 하고, 원래의 색이 덧칠로 변색하기도 한다. 테드 창이 말하는 ‘감정적 진실’처럼, 우리 기억 저장 창고는 그날 그 사람의 감정, 날씨, 분위기까지 더해서 에피소드를 저장한다. 그래서 진실과의 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흔들리고 불안정한 기억의 다리 위에 서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을 모두 세세히 그리고 선명하게 기억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매일 죄책감에 시달리고 과거에 발목을 잡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떼지 못할 것이다. 축적된 기억이 곧 우리겠지만 그 기억이 너무 완전하면 불행하다. 흔들려야 살아갈 수 있다.


소설의 원제인 ‘The Sense of an Ending’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멋진 제목으로 번역되었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자각하게 된 것’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뒤늦게 알게 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다. 신화 속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미리 알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동생으로서, 어떤 일의 결과를 미리 내다 볼 정도로 지혜로웠던 형과는 달리, 항상 일이 벌어지고서야 겨우 그 일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인생의 끝자락에 와서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And most of a lifetime later, I am only slightly clearer)’라는 토니의 에피메테우스적 고백처럼, 누군가의 비극을 내가 초래했다는 사실을 인생 끝자락에 가서야 알게 된다면, 그리고 오류가 난 기억 덕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면, 나의 ‘워블리’한 기억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줄리언 반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011),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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