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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Dec 21. 2022

그들의 땅에 서 보기

자리 바꿔 서 볼래요 (1) : 들어가는 말

그들의 땅에 서 보기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1967년에 출간한『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 등장한다. ‘로빈슨 크루소’다. 영국 작가 다니엘 디포가 무려 300여 년 전에 쓴 소설의 주인공을 20세기로 다시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디포의 소설『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 서사의 대표 신화이며, 주인공 로빈슨은 무인도 생존의 아이콘이다. 배구공 친구, 윌슨으로 유명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보면서도, 한강 밤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김 씨 표류기>를 보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원조 격인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유명한 소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사관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소설 속 로빈슨은 백인-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관, 대영제국의 식민주의 사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애초에 로빈슨이 난파하게 된 배를 탄 이유도 흑인 노예 밀반입을 위해서였다. 당시 흑인은 가장 값싼 노동력이었지만, 국가가 독과점 식으로 흑인 매매 시장을 운영해서 비싼 정가에 살 수밖에 없었다. 밀반입이 성공할 때 로빈슨이 가져갈 이득은 컸다. 그렇게 자본주의적 계산법에 따라 로빈슨은 길을 나섰다.


난파 후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로빈슨은, 원주민을 잡아서 노예로 삼는 상상을 하고, 그 상상은 현실이 된다. 식인종에게 희생당할 뻔한 원주민 소년을 구해주고, 그날이 금요일이라 무성의하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주인님’이라는 말을 먼저 가르치고, 야만적인 풍습을 버리도록, 기독교와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 나간다. 영국식 식민주의가 조그만 무인도에서 재현된다. 이 모든 것은 로빈슨이 들고 있던 총 한 자루 덕분이었다. 로빈슨은 섬의 왕이 된 자신을 찬양한다. ‘내 백성은 완전히 나에게 속해 있다. 나는 절대군주며 법을 집행하는 자다’.


소설은 유럽과 비유럽, 백인과 흑인, 문명인과 야만인의 이분법 속에서 ‘유럽인-백인-문명인’의 손을 들어준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며, 프라이데이와 같은 비유럽 야만인은 위계 체계 안에서 종이 된다. 하지만 프라이데이는 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섬에 들어온 사람이 총 한 자루로 섬을 장악한 뒤 자신을 종으로 삼아버리고, 섬을 떠나면서도 하인으로 데려가는 사실에 대해. 디포의 소설에서 프라이데이의 생각은 미미하고 목소리는 약하다.


이런 프라이데이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고 목소리를 찾아준 작품이 투르니에의『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이 소설은『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전복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은 로빈슨 크루소이지만,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주인공은 방드르디(프라이데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이다. 그는 로빈슨이 구축한 문명의 세계를 폭발로 날려 버리고, 원시적이면서 전복적인 행위들로 새 질서를 구축한다. 야만인 소년이 문명인 로빈슨을 가르친다. 소설의 한 장도 방드르디의 관점에서 서술됨으로써 300년 전에 강요당했던 침묵을 보상받고 주체적 목소리를 부여받는다.


투르니에 소설의 가장 큰 성과는 주와 종, 주체와 객체의 자리를 바꿔놓은 일이다. 인류 역사에는 자리바꿈,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보지 않아 생긴 비극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이 딛고 선 땅에서 그 사람들의 눈으로 한 번만 봤더라면, 역사서에 담긴 억압과 피의 총량은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부터 읽어 볼 소설들은, 투르니에의 소설처럼 ‘그 사람의 처지에서 한 번 생각해 보셨나요?’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역지사지는 과거에도 필요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자세다. 이제 ‘그들’의 땅에 설 준비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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