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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다락방의 목소리

자리 바꿔 서 볼래요(2) : 진 리스『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

다락방의 목소리


‘가정의 천사’. 19세기 영국 시인 코번트리 패트모어가 쓴 시의 제목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이상적 여성상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순결, 상냥함, 복종, 겸손의 미덕을 가진 아내. 밖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편을 상냥한 웃음으로 맞이하며 지친 남편을 위로할 줄 아는 천사 같은 아내. 그런 아내를 이상적 여성상으로 삼던 시대에 샬럿 브론테는『제인 에어』를 썼다.


‘커러 벨’이라는 남성의 필명으로 브론테가 1847년에 발표한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정의 천사’와는 거리가 꽤 먼,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 제인 에어다. 가부장제의 위엄을 상징하는 게이트헤드 저택의 ‘붉은 방’도,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는 로우드 학교의 엄한 훈육도 그녀의 독립적인 자아의식을 남성의 권위 안에 가두지 못했다. 천사 같은 아내를 원하는 로체스터에게도 ‘저는 천사가 아녜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제인. 21세기의 관점으로 보아도 주인공다움이 넘쳐나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광녀, 버사 메이슨 


이런 주인공을 두고, 영화로 치자면 조연급 중에서도 마이너 캐릭터인 ‘버사 메이슨’에게 더 관심을 가진 소설가가 있다. 도미니카 출신 작가, 진 리스다. 영국 속령이었던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그녀는 스코틀랜드계 크리올(서인도 제도의 흑인과 유럽의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16세에 영국으로 건너와 교육을 받았을 때, 어색한 영어 구사 때문에 이방인 취급을 당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버사가 자신처럼 크리올 여성이기 때문이었을까. 20세기 작가인 진 리스는 19세기 소설『제인 에어』를 다시 쓰며, 버사 메이슨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이 소설이 바로『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다.


‘버사 메이슨? 그녀가 누구였지?’라고『제인 에어』를 읽은 독자들도 잠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소설 속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대신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더 잘 알려진 버사 메이슨은 남편 로체스터에 의해 저택의 3층 다락방에 구금된 자메이카 출신 여성이다. 남편조차 ‘저 위층에 있는 미치광이 여자’라고 부르는 그녀는 ‘무서운 요괴’, ‘흡혈귀’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으며, 고딕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유령처럼 묘사된다. 한 마디로 버사는 ‘악마의 웃음소리’, ‘섬뜩한 발소리’, ‘문이 삐걱대는 소리’에나 어울리는 ‘광녀’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쓴 페미니즘 이론가,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광녀’를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을 감내하며 글을 써야 했던 여성 작가들의 분열된 자아상으로 보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글을 쓰고, 자신들의 작품을 남성의 필명으로 발표해야 했던 여성 작가들의 불안과 분노가,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 ‘광녀’를 통해 표출되었다고 분석했다.    

 

진 리스는 그들의 시선을 넘어서서 다른 층위의 페미니즘에서 광녀, 버사 메이슨을 바라본다. 제인이 전형적인 영국 백인 여성이라면, 버사는 백인과 흑인사이에서 태어난 자메이카 출신 혼혈여성이다. 같은 여성이라 하더라도 백인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그들이 받는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로체스터의 저택에서 버사가 감금당하는 3층 다락방과 제인이 쓰는 2층 가정교사 방은 둘 다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억압을 상징하지만, 그들이 기거하는 층이 다르듯이 억압의 형태도 다르다.


제인이 ‘저는 자주적인 의지를 가진 자유로운 인간이에요’라며 가부장제의 억압에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동안, 샬럿 브론테가 버사에게 허락한 것은 ‘으으으’라는 원시적인 발성뿐이다. 버사는 광기의 피가 흐르는 집안 내력을 가진 미친 여자이고, 백인 여성과 백인 남성의 이상적 결합을 방해하는 제3세계 어딘가로부터 떨어진 이질적인 존재다.     


▫️크리올 여성, 앙투아네트


투르니에의 소설이 로빈슨 크루소의 원주민 하인에게 목소리를 찾아주었듯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버사에게 이름, 정체성, 그리고 목소리를 되돌려준다. 버사는 로체스터가 결혼하면서 지어준 이름이었고, 원래 서인도 제도의 자메이카에서 살던 그녀의 이름은 앙투아네트였다. 엄마가 크리올이어서 흑인의 피가 섞인 그녀는 자메이카에서도 ‘하얀 바퀴벌레’, ‘흰 검둥이’로 불리면서 부당한 시선을 받았다.


그녀의 돈을 노린 백인 남성 로체스터와 결혼하지만, 순종적인 백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려던 로체스터가 ‘길게 찢어진 이방인의 눈’을 가진 앙투아네트에게 만족할 리는 만무했다. 유럽 백인 중심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로체스터에게 흑인 혼혈 아내는 낯선 이방인이자, 오베아라는 주술을 믿는 열등 종족이고, 크리올다운 광녀에 불과했다.


결혼을 통해 합법적으로 앙투아네트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자마자,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에게서 이름을 먼저 빼앗는다. 영국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성의 일차 표식인 자메이카식 이름을 지우고 영국적인 이름을 아내에게 붙여준다. 크리올 여성 앙투아네트는 그렇게 영국 여성 버사 메이슨이 되지만, 자의식 강한 여성 앙투아네트는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 “버사는 내 이름이 아니에요. 다름 사람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지요?”


앙투아네트가 로체스터의 손필드 저택에 강제 감금되는 이유는 그녀의 이런 반항적인 기질 때문이다. 그녀는 광기로 인해 감금된 것이 아니었다. 억압적 감금 때문에 점점 미쳐갈 뿐이었다. 브론테가 그녀에게 동물적 발화만 허락했다면, 리스는 ‘내가 밤이면 나와서 돌아다니는 이 마분지의 세계는 영국이 아니다’라는 비판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목소리를 앙투아네트에게 부여한다.


앙투아네트의 죽음에 대한 두 작가의 태도 차이도 크다. 브론테는 그녀를 저택에 불을 지르고 남편을 불구로 만든 미친 여자로 묘사한다. 그녀의 죽음도 광녀에 걸맞은 끔찍한 죽음이다.      


부인은 지붕 위에 서서 흉벽 위로 칼을 내두르면서 1마일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죠…. 정말로 덩치가 큰 여자로 길고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여자가 거기에 서 있을 때, 그 머리채가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죠…. 그 여자는 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뛰더니, 다음 순간에는 포석 위에 으깨어져 있었습니다…. 죽었냐고요? 그럼요. 골수와 피가 흐트러져 있고 돌덩이처럼 죽어 있었습죠. (『제인 에어 2』민음사 p.p. 379~380)


이에 반해 리스는, 억압의 상징이던 손필드 저택을 무너뜨리고,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 자의식과 주체성이 분명한 여성으로 앙투아네트를 그려낸다.


촛불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이제 드디어 나는 애가 여기에 왜 끌려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았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촛불이 깜박거렸고, 나는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손으로 막아주자 촛불은 다시 살아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이 캄캄한 길을 밝혀주기 위하여. (p. 261)      


▫️광막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진 리스의 성과는 투르니에처럼 주변인을 중심으로 불러낸 것이다. 제인 에어가 남성 중심 가부장제에 따라 타자(他者)의 위치로 밀려난 여성이라면, 앙투아네트이자 버사 메이슨은 제인의 위치에서 더 떠밀려 들어가 다락방까지 밀려난 주변인이다. 두 여성 모두 남성 중심 사회의 종속인들이지만, 그들이 받는 억압의 형태는 다르다. 우리는 제인 에어의 목소리도 들어야 하지만, 앙투아네트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두 명의 여성, 서인도 제도의 앙투아네트와 영국의 제인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 미셸 투르니에와 진 리스처럼 주변인들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작가들이 많아지다 보면, 이 세상은 다성(多聲)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세상이 되리라. 그러다 보면 사르가소 바다도 덜 광막해지지 않을까.        


 진 리스『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 (윤정길 옮김, 웅진씽크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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