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바꿔 서 볼래요 (3) :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1960)
“아저씨가 종이봉투에서 마신 것이 코카콜라였단 말씀이에요? 그냥 코카콜라였단 말이에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문장 하나를 꼽으라면 이 문장을 꼽겠다.
소설의 주인공인 스카웃은 마을의 술주정뱅이 레이몬드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코카콜라였던 것을 알고 놀란다. 매일 술에 찌들어 사는 술의 노예라고 마을 사람들이 그를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손에는 항상 검은 봉지가 들려 있고 그 안에는 원할 때마다 마실 수 있도록 술이 담겨 있다고 했는데 그게 고작 코카콜라였다니.
사실 레이몬드는 술주정뱅이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낙인찍혔을 뿐이었다. 빈곤하고 불행한 가정사에 흑인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까지, 밑바닥 하류 인생을 사는 그에게 구제할 길 없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이미지가 딱 들어맞았다. 레이몬드는 한마디로 집단이 거짓으로 형성한 편견의 희생자였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의견에 영향을 받는다. 대다수 사람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그런 걸 거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고, 사회적 분위기에 의심 없이 편승하기도 한다. 백 명 중 아흔아홉 명이 ‘레이몬드는 술의 노예’라고 말한다면 진실과는 상관없이 레이몬드는 술의 노예가 된다. 그것이 다수의 힘이다. 하지만 다수가 항상 옳을까? 『앵무새 죽이기』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다수의 생각은 과연 항상 옳은 것일까?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30년대, 공간적 배경은 앨라배마주의 메이콤. 비밀이라고는 없이 서로서로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작은 마을이다. 주인공은 취학 전 어린 소녀 스카웃으로서, 어른이 된 그녀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소설은 스카웃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이웃에 사는 ‘부 래들리’ 아저씨다. 그는 마을에서는 신화 같은 존재다. 15년 동안 집 밖을 나온 적이 없는데 무시무시한 폭력성이 격리의 계기와 소외의 동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부’를 둘러싼 소문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다. 달이 지는 밤이면 해골 같은 모습으로 밖에 나와 이 집 저 집 창문을 몰래 훔쳐본다고도 하고, 고양이 날고기를 먹는다는 말이 돈다. 얼굴엔 들쭉날쭉 길게 흉터가 나 있고, 이는 누렇게 썩어 있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언제나 침을 흘리고 있다고도 한다.
어른들은 ‘부’의 폭력성과 잔인함에 대해 아이들에게 경고한다. 그의 집 마당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 마을 어른과 아이 모두 두려움 속에서 지키고 있는 불문율이다. 과연 그는 마을의 안녕을 위협하는 해로운 존재인 걸까.
그런가 보다 하고 피하면 그만일 사람에게 스카웃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한다. 가끔 집 밖으로 나와서 집 안에서 무얼 하며 지내는지 알려달라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부’의 집 문틈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나무 옹이에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들을 몰래 넣어두는가 하면, 불이 난 어느 밤에는 한기를 느낀 스카웃에게 몰래 담요를 덮어주고 사라지기도 했다. 무언의 대화지만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스카웃과 오빠를 위험에서 구해 낸 일을 계기로 스카웃의 가족 앞에 모습을 드러낸 부 래들리.
앞서 레이몬드가 술의 노예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는 유령도 괴물도 악마도 아니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문턱을 넘는 것이 겁나고 힘든 나약한 인간이었을 뿐. 어쩌면 겁 많고 소심한 한 인간이 십오 년 동안 기다린 것은 집 밖으로 한 번만 나와달라는 이웃의 낮고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유해하고 부당한 신화를 만드는 대신 무해하고 따뜻한 관심을 한 번만 내비쳤더라면 그는 일찌감치 문밖으로 걸어 나왔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톰 로빈슨’ 사건이다. 흑인인 톰은 백인 여성인 메이옐라 이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강간한 것으로 기소되어 재판받고 있다. 스카웃의 아버지인 핀치 변호사는 톰의 변호를 맡고 있는데, 피고인 자신도 무죄를 주장하고 있고, 여러 정황상의 증거를 근거로 핀치도 톰의 무죄를 확신한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이웰 가는 온갖 질병이나 기생충의 온상이라고 할만한 집에 사는 하층민이다. 백인이라고는 하지만 백인들조차도 이들을 ‘쓰레기 백인(white trash)’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난하고 불결하고 무식하다. 어머니 없이 가족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 밥 이웰 밑에서 어린 동생들을 건사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메이옐라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이가 바로 톰 로빈슨이었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수리가 필요한 곳이 있을 때마다 메이옐라는 출근길의 톰에게 부탁했었다.
모두 쓰레기 가족이라고 멸시하는 가운데 편견 없이 친절을 베푸는 이웃 톰에게 깊이 의지하게 된 메이옐라. 어느 날 변함없이 도움을 주던 톰에게 그녀가 먼저 추파를 던졌고,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등장으로 그녀는 자신을 성폭력의 피해자로 둔갑시켜 버렸다.
기소된 내용을 뒤집을 만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도망쳤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결국 톰은 유죄 판결받는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달아났느냐는 변호사의 질문에 ‘변호사님도 저처럼 깜둥이였다면 겁이 났을 것’이라고 그는 답한다.
소설의 배경이자 사건이 일어난 곳인 메이콤 마을은 미국 안에서도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딥 사우스(Deep South) 지역인 앨라배마주에 있다. 실제로 1931년 스코츠보로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스코츠보로 사건 역시 소설 속 톰 로빈슨 사건처럼 백인 여성 두 명이 흑인 소년들에 의해 강간당했다고 거짓으로 주장하며 고소한 사건이다. 재판 중에 백인 여성들이 자신들의 거짓말을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덟 명의 소년 중 네 명에게 사형 또는 장기 징역형을 선고한 이 ‘사법살인’은, 이후 사법부의 자성 속에서 흑인을 배심원에 포함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소년들의 억울함은 누명이 씌워진 지 82년이 지난, 그 소년들이 모두 사망한 2013년이 되어서야 풀렸다.
현실의 스코츠보로 사건, 소설 속 톰 로빈슨 사건 둘 다 진실과는 무관하게 화이트 우위의 법칙에 따라 무고하게 흑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그 당시 백인과 흑인이 같은 상황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을 할 때 재판부와 배심원들의 신뢰는 오로지 백인을 향했다. 흑인은 무식하고 폭력적이며 믿을만하지 않다는 고정관념을 마음속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은 다수에 의해 오랫동안 형성된 정형화된 생각이다. 소설에서 핀치 변호사는 이것을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비밀의 법정’이라고 불렀다. 죄를 지은 흑인이든, 짓지 않은 흑인이든 법정에 서 있는 흑인은 재판도 받기 전에 이미 모두 유죄였다. ‘흑인이 다 그렇지 뭐’라는 부당한 정서는 사회적으로는 이미 온당했으므로.
사회적 약자인 흑인 톰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현장에서 도망친 탓에 유죄 판결받고 감옥에 간 톰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또 한 번의 도망이었다. 탈옥을 시도한 톰은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가장으로서 자기 삶을 성실하게 살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죄 밖에 없었던 한 억울한 흑인의 죽음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전형적인 깜둥이의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무계획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스스로는 죄가 없고 대부분 사람에게는 해가 없다고 생각하며 다수가 만들어내는 ‘정형화된 생각’은 사실 모두에게 유해하며 그러므로 유죄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전형’ 속에서 레이몬드같은 사람은 술에 절어 살 수밖에 없다. 부 래들리같이 소통이 없는 사람은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있는 악마가 될 수밖에 없고, 톰 로빈슨 같은 흑인은 강간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모든 일에 무계획적 일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수에 의해 형성된 생각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내가 태어날 공간과 시간을 잠식해 내려온 오래된 그 무엇이며, 태어난 그 순간부터도 다수의 의견이란 이름으로 나의 판단에 개입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나도 그 다수에 자연스럽게 포함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야’라는 핀치 변호사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 노래할 뿐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괴롭히고 때론 죽이기까지 하는 집단 편견의 폭력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 『앵무새 죽이기』.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부 래들리의 집 앞에 서 있다. 부 래들리의 관점에서 마을 풍경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의 집은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바라보는 ‘객체’였기 때문이다. 가로등으로 환해진 길 위에 서 있는 집들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곳, 그 자리에 서서 익숙한 풍경을 한 번쯤 다르게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며 스카웃이 성장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잘만 보면 대부분 사람은 다 멋지단다’라는 핀치 변호사의 말대로 잘 보면 대부분 사람은 다 멋질 것이다. 잘 볼 마음을 먹고, 잘 보기 위해서 그 사람들이 선 자리에도 한 번 서 본다면.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1960), (김욱동 옮김, 문예출판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