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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죄인인데 악인은 아닌

죄인일까요, 악인일까요(2) : 아서 밀러『모두가 나의 아들』(1947)

죄인인데 악인은 아닌


아서 밀러의 사회비판극『모두가 나의 아들』을 읽으면서 죄와 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다. 8월 어느 일요일 아침에 1막이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 2시에 3막으로 끝이 나는 이야기는 모두 한 장소, 조 켈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등장인물로는 예순이 다 되어가는 조와 케이트 부부, 그들의 아들 크리스, 크리스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앤, 앤의 오빠 조지, 몇몇 이웃들, 그리고 등장은 하지 않지만,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감이 큰 인물인 조의 둘째 아들 래리가 있다. 래리는 2차 세계대전 중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모두 전사했다고 말하지만, 래리의 엄마, 케이트는 실종상태인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는다.      


▫️부러진 나무 


실종된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고는 조 켈러의 가족의 삶은 무난하고 평온하다. 조의 공장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고 나중에 성실한 아들 크리스에게 사업체를 물려줄 생각이다. 극이 시작되는 8월의 어느 날, 극 전체를 지배할 상징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래리의 출생 나무가 간밤에 불던 바람에 부러진 것이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며 애지중지 돌보던 나무가 석연찮게 꺾여버린 날, 하필 과거의 동업자였던 스티브의 딸 앤과 아들 조지가 차례로 조의 집을 방문한다. 우연히 같은 날 발생한 두 사건이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고, 이에 따라 켈러 가족의 삶에도 나무처럼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과거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3년 전, 조는 동업자 스티브와 함께 비행기 부품을 납품하는 군수물자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라 그의 사업은 호황이었다. 어느 날 금이 간 수십 개의 실린더 헤드를 발견한 동업자 스티브가 그것들을 폐기 처리하는 대신, 용접만 해서 그대로 군에 납품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P-40 기종을 몰았던 스물한 명의 군인들이 호주 상공에서 비행기와 함께 추락할 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신문은 비극을 연일 대서특필했고, 공장의 공동 책임자였던 조와 스티브는 재판에 넘겨진다. 마침 그날 몸이 아파 결근한 조는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죄방면 되었고, 스티브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현재도 감옥에 있다. 그의 아들딸은 수치심 때문에 아버지와 거의 연을 끊고 살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를 오랜만에 면회했다는 스티브의 아들 조지가 조를 찾아온다는 연락을 받는다. ‘빈틈없이 구셔야 해요’라고 남편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는 케이트. 어떤 진실이 감춰져 있길래 조와 케이트는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사실 조는 그날 아파서 출근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출근 준비를 하던 중 그는 불량 실린더 헤드의 처리를 의논하는 스티브의 전화를 받았고 용접해서 그냥 선적하라고 지시했다. 책임은 두 사람이 같이 져야 했으나, 오랜 친구도 배신하고 그의 양심도 배신한 채, 조는 지난 3년의 세월을 과거를 잊은 사람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나무를 부러지게 한 바람은, 3년 전 일을 눈앞에 데려오며 더 큰 붕괴를 예고한다.   

   

▫️아들을 위하여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잘못을 하고, 그중에는 ‘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매우 큰 잘못도 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죄’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들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자기합리화의 도주로를 마련하기도 한다. 자기합리화는 본질적으로 자기방어 작용이다. 방어기제의 작동은 자신을 너무 망가뜨리지 않도록 안전가드 역할을 하지만, 지나치면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사람이 된다.


이 극의 조 켈러가 바로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스물한 명의 젊은이를 희생시키고, 이웃에 살던 평생의 친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도, 그는 계속 공장을 더 확장해나가며 성공을 위해 기를 쓰고 살았다. 자기합리화를 통해 마땅히 가졌어야 할 양심의 가책도 덜어내었다. 사십 년이나 키워 온 사업이 망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자신을 위로했고, 누군가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결함을 알아채고 저지해 줄 거로 생각했다며 청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도 희석했다. 무엇보다 가족을 위해, 아들을 위해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는 말로, 조는 마지막 남았을 죄책감까지 덜어냈다.    


크리스, 난 널 위해서 그렇게 했단다. 그건 기회였고 난 널 위해서 그 기회를 잡은 거야. 내 나이 예순하나에, 언제 또 그런 기회를 얻어 널 위해 뭔가 해줄 수 있었겠니? 예순하나에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순 없단다……널 위해서다. 너를 위한 사업이었으니까! (p. 120)     


조와 케이트 부부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사회인으로서의 도덕적 책임 의식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고한 죽음에 대한 죄책감, 잘못에 대한 책임감이 들어 있어야 할 그들의 양심에는 이기적인 가족애,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는 마음만 들어 있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쓴 스티븐 핑거는 ‘도덕주의자의 관점은 피해자의 관점이다’라고 했다. 매일 실종된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는 케이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스물한 명 젊은이들 부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지 않았고, 자식에게 성공한 공장을 물려주는 것이 인생 목표인 조의 눈에는 미래라는 가능성의 시간을 강탈당한 청년들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았다. 피해자의 관점으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이들 부부에게 세상이란 오로지 그들의 아들들을 위한 무대였다.      


▫️죄와 악


조에게 일말의 양심과 죄책감이 있었더라면 속죄의 기회는 물론 있었다.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고 법에 따라 벌을 받으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를 그는 자식들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유 능력의 결핍 때문이다. ‘너희들의 문제는 생각이 너무 많다(원문 강조)는 거야’라고 케이트가 크리스와 조지에게 말하는 것처럼, 켈러 부부는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나무가 바람에 꺾인 것처럼, 모든 일을 그저 운이 나빠서 ‘번개’를 맞은 사건 정도로 치부한다.


『속죄』에 나오는 말처럼, 조는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부족한 사람이다. 죄는 지었지만 스스로 악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 온 조. ‘아버지께선 스물한 명의 젊은이를 죽인 거예요…. 그들을 살해했어요’라고 크리스가 말하는 순간에도, 그는 ‘어떻게 내가 누굴 죽일 수 있겠니?’라고 반박한다. 조에게 그 자신은 여전히 운이 나빴던 선한 사람이다.

스티븐 핑거는 우리가 ‘순수한 악의 신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악’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 공포 영화, 아동 문학, 민족주의 신화, 선정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는 악은 ‘진정한 악’의 모습을 왜곡한다. 사악한 모습에 튀어나올 듯 벌건 눈알을 가지고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악인이라는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핑거의 주장대로, ‘악은 대체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저지르고’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어난 상황에 대해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식으로 반응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조 켈러가 가족과 아들들을 위해 헌신한 가장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 말고 누군가가 위험을 감지하리라 믿었다고 책임 분량을 축소한 것처럼 말이다. 조는 죄인이고 악인이지만, 그 자신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악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누군가를 죽게 했으니 운 나쁜 죄인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들, 아들들


그렇다면 그의 가족이 탈 비행기라도 그가 그런 부품을 납품할 수 있었을까. 불량품으로 인해 추락할 확률이 백 분의 일이라도 있는 비행기에 그의 소중한 두 아들이 탄다고 생각했다면, 과연 누군가 결함을 발견해서 이륙을 막아줄 거라며 손 놓고 있을 수 있었을까. 아서 밀러는 이 질문을 조의 둘째 아들 래리의 희생을 통해 던지고 있다.


래리의 연인이었던 앤이 공개한 편지에는 래리의 실종 이유가 적혀 있었다. ‘매일같이 서너 명씩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그런데 아버지는 거기 앉아서 사업을 하고 계셨다니……’라는 말과 함께 자살 비행이 암시된 편지였다. 래리는 실종이 아니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아버지 대신 죄책감을 느끼고,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책임을 지고 싶어서 스스로 비행기를 몰고 나갔던 것이다. 아버지 대신 속죄의 길을 간 아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조는 비로소 스물한 명의 청년들 모두가 자기 아들들임을 깨닫는다.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곧 내려오겠소.

     

곧 내려오겠다던 조는 자살로 속죄의 길을 떠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 말이에요’라는 크리스의 말처럼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떠났을까. 또 남겨진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 이기심의 울타리를 조금씩 허물어가면서.      


아서 밀러『모두가 나의 아들』(1947), (최영 옮김, 민음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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