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일까요, 악인일까요 (3) :베른하르트 슐링크『책 읽어주는 남자』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감옥을 지어 왔다. 유토피아를 건설하러 미국 뉴잉글랜드에 정착했던 초기 청교도인들도 도착하자마자 만든 것이 감옥이었다. 죄와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일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감옥살이했던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의 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죄인들은 얼마나 될까. 물론 억울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벌의 영역과 참회의 영역은 다르다. 벌과 참회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이상적이겠지만, 벌만 이루어지고 참회가 없기도 하고, 벌은 없지만 참회가 일어나기도 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책 읽어주는 남자』는 한나라는 이름을 가졌던 한 여성의 죄와 벌, 그리고 참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일인칭 화자 미하엘 베르크의 회고로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인 1950년대의 어느 날,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은 서른여섯 살의 전차 개표원 한나 슈미츠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한나의 아파트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던 그들에겐 독특한 일상이 생긴다. 미하엘의 책 낭독이다. 한나의 요구에 따라 책을 읽어주던 어느 날 한나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몇 해가 지난 후 법정에서 우연히 재회한 미하엘과 한나. 법과대학생이 되어 세미나 수업을 위한 재판 방청을 하러 온 미하엘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한나를 보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하면서 저지른 범죄행위 때문에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미하엘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한나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다. 그 사실을 드러내기 싫어서 함께 넘겨진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모두 떠안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 한나를 보며 미하엘의 마음은 착잡해진다.
대학을 졸업한 미하엘은 결혼하고 딸이 태어나지만 곧 이혼한다. 한나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던 그는 어느 날부터 읽고 있던 소설을 녹음해서 복역 중인 그녀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문맹인 한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이 일은 10년간 규칙적으로 지속되고 한나는 녹음된 목소리와 교도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대조해가며 홀로 글자를 깨우친다. 드디어 미하엘에게 편지까지 써서 보내게 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하엘은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긴 옥살이 끝에 마침내 전해진 사면 소식. 출소를 앞둔 한나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미하엘은 준비하지만, 출소 날 아침 한나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유언에 따라 한나가 남긴 돈을 ‘문맹 퇴치를 위한 유대인 연맹’ 앞으로 송금하고 미하엘은 그녀의 무덤 앞에 선다.
주인공 한나는 문맹이다. 미하엘과 만날 때마다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그녀는, 이 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했을 때도 유대인 소녀들에게 책 읽기를 시킨 전력이 있다. 문자 우위의 시대에 홀로 구술문화에 속해 있는 한나는 문자문화에 접속 못 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미하엘에게 책 낭독을 시키면서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갑자기 살던 곳을 떠난 이유도 일하던 직장에서 문서를 다뤄야 하는 사무직으로 승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법정에서도 한나는 문맹임을 고백하느니 차라리 죄를 혼자 덮어쓰는 길을 택했다.
문맹인 한나의 비극이 문자의 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하던 그녀를 피고인으로 법정에 세운 것은 홀로코스트 전범들을 쫓던 경찰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었다. 어느 폭격의 밤에 교회에 임시 감금되었던 유대인 여성들은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끔찍한 화재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는데, 한 명의 도망자도 발생시키지 않으려고 한나와 동료 수용소 감시원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사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여성이 그날의 참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책을 출간하게 되면서 한나는 동료 감시원들과 함께 기소된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 ‘문맹’은 무지, 무사유와 동의어다. 화재 참사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보낼 사람들을 선발하는 과정에 참여한 것으로도 기소된 한나는 자기 행동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책임감으로 한 일이었다며 자신을 변호한다. 결국 종신형을 받아 감옥에 가지만, 왜 가는지 알지 못한다. 한나에게 죄와 벌은 있지만 참회는 없다. 참회가 없는 이유는 죄를 죄로 인식하는 사유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나의 참회가 시작되는 것은 글자를 깨우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녀의 문맹 탈출은 미하일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나이 차이가 많은 두 사람이 상징하는 것은 나치 독일을 위해 일했던 전범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시키니까 했고, 명령받았으니 행했다는 선대 전범들의 무사유에 대해, 그것이 바로 죄라고 후손들이라도 말해줘야 한다는 작가의 무거운 역사적 책임 의식이 투영된 인물이 바로 한나와 미하엘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하엘이 녹음한 첫 번째 텍스트가 호머의『오디세이』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호머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귀향하기까지 10년에 걸친 모험담을 그렸는데, 쉴링크의 소설에서도 한나가 받은 첫 번째 테이프와 사면 직전에 받은 마지막 테이프의 간격이 10년이다.
10년에 걸친 한나의 문맹 탈출 오디세이. 하지만 그 기간은 글자를 알아가는 즐거움만 준 날들은 아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무사유에서 사유로, 죄에 대한 무지에서 참회로 이어지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한나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벌의 시작이었다. 결국 한나는 석방 당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속죄의 길을 떠난다.
한나가 죽은 후 미하엘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그녀가 생활했던 감방에서 발견한다. 지금은 홀로코스트 관련 저술로 너무나 유명해진 책이지만 원래는 미국 매거진인 ‘뉴요커’의 재정 지원으로 아렌트가 다섯 차례에 걸쳐 기고한 보고서형식 기사문이었다. ‘뉴요커’의 특파원자격으로 이스라엘에서 열린 유대인 학살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작성한 『전반적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1965년에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단 채 책으로 출간되고 유대인들의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된다.
유대인들이 분노한 이유는 악랄한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 때문이었다.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악의 고의성도 범죄의 동기도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저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명령체계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한 나치의 무지한 일꾼에 불과했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p. 209)
아이히만의 모습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일했던 한나의 모습이 겹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는데 무자비한 성실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한나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맡은 일은 나머지 인원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녀의 행위가 수감자들을 가스실로 내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느냐고 재판장이 묻자 한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재판장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p.p. 143~144)
홀로코스트라는 거대 악의 현장에 주범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한나와 아이히만처럼 지극히 평범한 우리 중의 누군가의 모습이라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아렌트의 말처럼 이들이 차라리 잔혹동화 속 푸른 수염 사나이 같은 사람이면 더 이해할 수 있고 덜 상처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민간인 희생자 수가 늘어나는 미얀마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총구를 민간인에게도 겨누라고 말하는 명령체계 속 ‘한나들’을 생각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문맹 시절의 한나처럼 그들도 자신에게 배당된 일을 그저 성실하게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평범한 얼굴의 악이 역사 안에서 반복되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의 독일어 원제는 ‘낭독자(Der Voleser)’다. 미하엘의 낭독을 통해 한나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죄를 인식해가듯이, 이 소설이 낭독하는 죄와 참회의 이야기를 들으며 악의 현장에 있는 누군가도 무사유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책 읽어주는 남자』(1995), (김재혁 옮김, 시공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