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1) : 들어가는 말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동판화 <등잔불 옆에서 책 읽기> (1858)를 보며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독서였던 그 시절, 나는 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었다. 이야기의 세계가 너무 재미있어서 다 읽지 않고서는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으로부터 강제 소등 명령이 떨어졌다. ‘열 시에는 무조건 불을 끄고 자야 해’. 키와 체중이 평균보다 한참 아래인 딸을 걱정하던 극단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불을 끄고 누우면 방금 읽은 장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주인공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 윗부분의 유리창이 문제였다. 결국 대응책을 마련했다. 하굣길 문구사에서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 등을 샀다. 필라멘트가 보이는 메추리알만 한 전구를 장착한 주먹만 한 등.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고 적군은 잘 속아 넘어갔다. 열 시에 전깃불을 끄고 이불 안으로 매복해 들어가서 메추리알 등을 켜면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되었다. 책 한 권과 책을 비춰주는 작은 등, 그리고 책을 읽는 나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시간. 나는 그 시간을 정말 사랑했다. 나중에 커서 읽게 되는 고전들의 축약판인 세계 명작시리즈 완독은 그 이불 안에서 메추리알 등과 함께 이루어졌다.
휘슬러가 그린 여자의 모습이 바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인 것 같아 자꾸 눈길이 간다. 등잔불 아래 찻잔을 옆에 놓아두고, 책을 읽는 여자. 열린 페이지를 향해 뛰어 들어가기라도 할 듯 눈은 초 몰입 상태로 책에 근접해 있다. 사이에 틈 하나 없어 보이는 책과 여자를 보며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읽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등잔불과 책과 그 책을 읽는 여자. 이 순간 세상을 구성하는 3요소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취미를 묻는 말에 일 초도 망설임 없이 ‘책 읽기’라고 답해 온 나는 지금도 여전히 책이 좋다.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한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고, 여행 가서도 작가의 집을 방문하고 독특한 책갈피들을 모은다. 오래오래 책을 읽기 위해 눈 건강에 좋다는 차를 마시고 보조제를 먹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서점에 가서 책을 몇 권씩 사 온다. 이사 다닐 때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을 좌절하게 할 만큼 책이 많아서 오카자키 다케시가 쓴『장서의 괴로움』두 번째 권은 조잡하게나마 내가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책들이 빼곡한 방에 갑자기 큰 홀이 생기며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앨리스’적인 상상을 해 본 적도 있다.
이런 나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책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두렵게도 이미 시작된 일인지 모르겠다. 책들이 이 세상에 오래 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장의 주제를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로 정했다.
지금부터 소개할 두 권의 책들은 책이 사라진 세상의 이야기이다.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한 권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미래 세상을 그린 다른 한 권도 70년 전에 쓰인 책이라서 이야기 속의 미래시제가 우리의 현재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독자가 있어야 존재 가치를 발휘한다. 책을 집어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을 줄 아는 독자의 손과 눈이 있어야 하고, 와닿는 문장 앞에서 한참 머물 수 있는 독자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다 읽고도 쉬이 떠나지 못하는 여운의 감정은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책은 흔하디 흔하고 클릭 한 번으로 집까지 쉽게 배달되는 세상에 살면서도, 독자가 줄어들고 책이 사라지고 있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오늘도 나 혼자 괴롭다.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1)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