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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발자크가 있는 삶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 (2) :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발자크가 있는 삶


1966년 마오쩌둥이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으킨 중국 문화대혁명은, 정적 류사오치를 제거한 1969년에 마오쩌둥 스스로 종식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홍위병의 세력을 등에 업은 몇몇 실세 권력자들에 의해 1976년까지 지속되었다.『사람아 아, 사람아!』의 작가 다이 허우잉이 작가 후기에서 썼듯이, 이 정치 광풍의 시기는 ‘중국의 전 국토에서 한시도 쉴 새 없이 계급투쟁과 노선투쟁이라는 두 줄의 현이 계속 켜지던’ 때였다. 


가장 큰 희생자는 예술인들,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당국은 자본주의 사상에 물든 위험 분자인 이들을 사상 재교육을 위해 외딴곳으로 유형을 보내 버렸고, 이들이 쓴 책들과 읽던 책들은 금서로 지정하여 불태웠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를 쓴 다이 시지에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부르주아 지식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재교육대상자로 지목되어 쓰촨 성에서 3년간 고초를 겪었던 그는, 이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유형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고 2002년에는 직접 영화로도 제작한다.     


▫️구전 이야기와 기록 이야기


소설은 투쟁의 곡조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1971년의 어느 한 산촌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하늘긴꼬리닭’이라 불리는 마을에 지식인의 아들 두 명이 재교육을 받으러 온다. 십 대 후반의 화자인 ‘나’와 친구인 ‘뤄’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감시와 교육을 받으며 이들은 오두막집에서 기약 없는 유형 생활을 시작한다. 혹독한 노동과 사상 재무장을 통해 이들은 과연 혁명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 


재교육은 한 마디로 실패였다. 바로 ‘이야기’ 때문이었다. 고된 노역을 통해 노동의 기쁨과 인민의 책임을 배워야 할 청년들이 이야기꾼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기 시작한다. 당원들의 저서와 사상교육을 위한 학술서를 제외하고 모든 책이 사라진 세상에서 청년들은 기억과 입담으로 그들이 아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에 매혹된 마을 사람들은 강제 노역을 해야 할 청년들에게 영화를 보고 오라고 하고, 뛰어난 모사와 생생한 연기력으로 재생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울고 웃는다. 대성공을 거둔 ‘구전 영화’ 소식은 가까운 이웃 마을까지 전해지고, 산골의 ‘공주’라는 미모의 바느질 처녀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며 ‘영화 이야기꾼 뤄에게’라는 편지를 써서 그들을 초대하기에 이른다. 혁명의 전사를 길러내야 할 마을이 이제 온통 ‘이야기’로 들썩인다.


 이런 가운데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책이 등장한 것이다. 화자와 뤄는 이웃 마을에서 재교육받는 고향 친구 ‘안경잡이’가 침대 밑에 숨겨둔 가죽가방을 우연히 발견한다. 금서인 서양 서적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들의 가슴은 뛰고, 안경알이 깨져 노동이 힘든 안경잡이의 일을 대신해주는 조건으로 마침내 그들의 손에 서양 소설책 한 권이 쥐어진다. 이야기에 빠져들어 배고픈 줄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장면에 공감할 것이다.      


뤄는 ‘안경잡이’가 책을 준 그날 밤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해서 새벽녘까지 모두 읽어치웠다. 책을 다 읽은 그는 남폿불을 끄고는 나를 깨워 책을 내밀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밤이 이슥하도록 사랑과 기적으로 가득한 프랑스 이야기에 푹 빠져,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보냈다. (p. 80)     


책을 돌려주기 전에 마음에 와닿는 몇 문장이라도 베껴두고 싶은 필사의 욕망을 화자에게 심어준 책은 마오쩌둥의『붉은 어록』이 아니었다. 돈과 사랑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담은, 그래서 부르주아 문학으로 낙인찍힌 발자크의 소설『위르쉴 미루에』였다. 종이를 구할 수 없어서 마을 사람들이 선물한 낡은 양가죽 점퍼 안쪽 면에 화자는 정성스럽게 한 자 한 자 필사를 시작한다.     


늙은 산양 가죽에 만년필로 글씨를 쓰기란 쉽지 않았다. 가죽은 윤기가 없고 꺼칠꺼칠해서 가능한 한 많은 본문을 옮기려면 깨알같이 작은 글자로 써야 했는데 그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소맷자락까지 글로 가득 채웠을 때는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아팠다. (p. 83)     


이 장면을 보며 기원전 2세기 무렵 소아시아에 있었던 페르가몬 도서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도서관이 생기면서 그 당시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입지가 약화하자 이집트는 돌연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해 버렸다. 종이를 만드는 재료였던 파피루스를 얻지 못하게 된 페르가몬 도서관이 대안으로 사용한 것이 다소 비싼 양피지였다. 탄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책을 계속 만들어내고자 했던 열망의 상징물 양피지. 책이 불태워지고, 종이는 희귀해지고, 펜의 잉크도 말라가는 문예 탄압 속에서 이루어지는 화자의 양가죽 필사 장면에서, 이야기를 기록하고 후대에 전하고 싶었던 태곳적 인류의 경건한 소망을 만나게 된다.


다시 산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제 이곳은 구전 이야기와 기록 이야기라는 두 가지 형태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첨삭과 왜곡 때문에 더 다양하고 재미있어진 구전 이야기와 희소하지만 원문을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기록 이야기. 안경잡이가 마을을 떠나게 된다는 소식에 금서가 들어 있는 가죽가방을 성공적으로 훔치게 되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전리품들이 화자와 뤄, 그리고 공모자인 바느질 처녀의 품 안에 들어왔다.    

  

서양의 위대한 작가들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맨 위에는 우리의 오랜 친구 발자크의 소설 대여섯 권이 놓여 있고, 다음으로 빅토르 위고, 스탕달, 뒤마, 플로베르, 보들레르, 로맹 롤랑, 루소, 톨스토이, 고골, 도스토옙스키, 그런가 하면 디킨스, 키플링, 에밀리 브론테 같은 영국 작가들의 책도 있었다.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p. 138)     


▫️그리하여 그들은


책의 힘은 위대했다. 화자는 ‘수백 페이지의 거친 강물이 나를 집어삼켰다’라고 말하며『장크리스토프』와 사랑에 빠졌고, 뤄와 바느질 처녀는『외제니 그랑데』를 읽으며 욕망에 충실한 사랑꾼들이 되어갔다. 금서가 들어와 있는 줄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도 부지불식간에 금서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화자와 뤄가 책에서 읽은 내용들을 이야기로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이야기에 빠져든 재봉사의 경우가 그러했다. 아흐레 밤을 자지 않고 새벽빛이 창을 비출 때까지 이야기를 들은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의 옷들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곧 세일러복 상의, 선원풍의 파란 바지를 입은 마을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뒤마의 문하생’이 되어버린 재봉사가 만든 닻 모양 무늬는 하늘긴꼬리닭 마을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문양이 되었다. 


바느질 처녀의 변화가 가장 컸다. 첩첩산중에서 평생 바느질장이로 늙어갈 것 같았던 그녀가『보바리 부인』에 나오는 디자인을 흉내를 내 브래지어를 만들더니, 남성복 스타일의 재킷을 입고 신여성 같은 단발머리를 한 채 새하얀 테니스화를 신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뤄는 ‘넉 달 동안 책을 읽어준 보람이 있잖아’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지만, 그가 읽어준 이야기 때문에 연인을 잃었다는 생각에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책을 불태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후손들


산촌에서의 재교육. 그 주체와 객체는 누구였을까. 책을 화형에 처한 마오쩌둥과 그 당원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를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인간은 먼 옛날부터 이야기를 만들고,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고, 양피지에라도 적어서 후대에 전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외딴 오지의 산촌 사람들이 바로 그 태고의 인류다. 


매질을 통해 균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고, 말라리아를 들여온 악령을 쫓기 위해 무당을 부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의 전사라기보다 문명 초기 고대 인류의 모습에 더 가깝다. 혁명의 주체라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노동자들이 수염이 난 발자크의 흑백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카를 마르크스인가’ ‘레닌인가’ ‘사복 차림을 한 스탈린일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장면은 웃음이 난다. 


마오쩌둥과 홍위병보다 발자크와 뒤마를 더 사랑하고, 사상교육 책들보다 입으로 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더 사랑하는 산촌 사람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에서 무슨 사상이니 계급투쟁이니 하는 말보다 이야기가 먼저 생겨났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분서는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그의 무산계급 인민들도 이야기를 통해 재미와 치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변화해가던 옛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나에게도 ‘발자크’가 있었던 가라고 생각한다. 바느질을 멈추게 할 만큼, 삶에 균열을 가져올 만큼 강렬하게 책의 영향권 아래 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책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이 소설을 읽으며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강렬하게 삶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분서갱유의 시대가 아니라 사방에 읽을 책들이 널려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다이 시지에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2000), (이원희 옮김, 현대문학,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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