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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Dec 21. 2022

나의 산투르는 어디에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인가요(1) : 들어가는 말

나의 산투르는 어디에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12, p. 24)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자신이 ‘인간’이므로 원하는 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당당하게 고용주에게 요구하는 인물, 알렉시스 조르바가 등장한다. 과거에 얽매이지도,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오늘을 저당 잡히지도 않으면서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조르바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산투르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사고와 행동을 하는 그를 보며,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라고 화자는 말한다.


찾으려고는 했지만, 도저히 만날 수는 없었던 사람, 조르바는 사실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다. 다만 기계적 사고와 노동의 시간에 함몰되어 우리 자신조차 존재를 잊고 지냈던 사람일 뿐이다. 조르바는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다.


우리가 조르바를 만날 수 없는 이유는, 만나서 좌절된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조르바처럼 자기 삶을 풍부하게 살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의사결정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자유의지는 살아가면서 종종 억압되고 좌절당한다. 보이는 힘에 의해, 그리고 때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좌절이 되풀이되면 인간은 다시 내면의 조르바를 꺼낼 용기를 갖지 못한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소설『체벤구르』에 나오는 보셰프라는 인물을 예로 들어 보자. 작은 기계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서 쫓겨난다. 해고 통지서에는 그가 자주 사색에 빠지고 작업 속도가 느려져서 생산 현장에서 축출한다고 적혀 있다.


변호나 항의를 해 볼 요량으로 공장위원회를 찾아간 보셰프에게, 근무 중에 우두커니 서서 뭘 생각하느냐는 물음이 떨어진다. 그는 ‘공동으로 함께 나누는 삶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고 답하며 “내면에서 추구하는 의미가 충족된다면 생산성도 향상되리라 봅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공장위원회는 다시 묻는다. “모두가 생각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정작 일은 누가 한단 말이오?” 보셰프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일해도 의미가 없는 셈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속으로만 말하고 그냥 나온다.


서로 손을 잡고 연대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꿈꾸는 보셰프의 이상은 순수하다. 생각하며 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인간적이다. 하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더 이상 항의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봐야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기계적인 일만 반복해주기를 바라는 사회는, 생각하며 살기를 원하는 보셰프를 품어줄 수 없다. 보셰프의 ‘조르바’는 그렇게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다음에 소개할 두 편의 소설에는 자유의지가 꺾이고 억압당하고 점점 내면의 조르바를 잃어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각자의 우주 안에서는 주인일 그들이 삶의 작은 구덩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힘없이 늙어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옆에 있다면 조르바의 악기 산투르를 그들의 손에 쥐여주고 싶다. 그리고 세상이 정해둔 곡조가 아니라 그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악보를 벗어난 그 곡을 살아 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마음껏 연주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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