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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떠나는 자, 떠나지 못하는 자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인가요(2) : 이디스 워튼『이선 프롬』(1911)

 떠나는 자, 떠나지 못하는 자


▫️내부와 외부의 경합


우리는 과연 우리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우리가 스스로 내린다고 믿는 수많은 결정이 사실은 여러 대립하는 힘들이 경합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생긴 ‘마지막 충동(last appetite)’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홉스의 주장대로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유약하고 충동적일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독립된 자아를 갖고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내리는 많은 결정은 스스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욕구,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기질, 혹은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 이루어질 때가 더 많다.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에 등장하는 허스트우드 같은 사람이 저지른 공금횡령 행위가 그러한 예다. 도덕적 가치에 큰 의미를 두고 살던 허스트우드는 절대로 그러한 범법행위를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캐리를 원하는 순간적 충동이 범죄에 대한 혐오를 이기고 순식간에 그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우리 내면의 의지와 경합하는 외부의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이디스 워튼이 쓴 『이선 프롬』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선’의 삶을 들여다보며 과연 순수한 의미의 자유의지란 것이 인간에게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려 한다. 외부의 힘으로 의지가 박제된 삶을 사는 쓸쓸한 겨울 풍경 같은 이선 프롬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좌초된 삶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 ‘스탁필드’에 지역 토박이 이선 프롬이 살고 있다. 한때 도시 생활을 꿈꾸며 우스터의 공과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곧 복학하려던 그의 생각은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의 병간호까지 하느라 좌절된다. 어머니 간호를 도와주러 온 사촌 누이 지나와 결혼한 뒤 드디어 농촌을 떠날 수 있다는 꿈에 부푼 것도 잠시, 이번에는 아내를 간병하느라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엔지니어가 되어 강연이 열리고 도서관이 있고 무언가 사람들이 흥미로운 일을 하는 도시의 삶을 원했던 이선. 그에게 병든 아내와의 농촌 생활은 감옥과도 같았다. 팔려고 내놓은 농장은 나가지도 않고 점점 궁핍해져 가는 생활에 아내의 짜증은 날로 더해갔다. 큰 애정은 없었지만 외롭지 않기 위해 결혼한 이선은 혼자일 때 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조차 ‘이선의 밥그릇은 첫술을 뜰 때부터 질병과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었던 거지’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힘들고 고단했다.  


이런 그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들어온다. 집 안이 망해 딱히 머물 곳이 없는 아내의 사촌 매티가 아내의 병간호를 도와줄 겸 한집에 살기 시작한 것이다. 활기 넘치고 관찰력이 뛰어난 매티와, ‘오리온자리’, ‘플레이아디스 성단’ 등 자연과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순수한 정신적 교감을 느끼게 된 이선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는 마을과 집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된다. 매티야말로 지적 대화와 교감에 목말랐던 이선에게 최고의 소울메이트였다.


하지만 행복감도 잠시, 서로 이끌리는 두 사람의 마음을 눈치챈 이선의 아내 지나는 매티를 내보내고 다른 간병인을 들이기로 한다. 매티를 집에 그대로 두고 싶어 하는 이선과 내보내기를 원하는 지나는 7년여의 결혼 생활 중 최초로 극한 대립 관계에 놓인다. ‘지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 해 왔어. 하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고 선언한 이선은 매티와 함께 서부로 가서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의 굳은 결심은 아내에게 농장과 목재소를 넘겨주면 그의 수중에 한 푼의 돈도 남지 않게 된다는 현실적 문제와 부딪치며 약해진다. 결국 그는 불행을 인내로 버티기로 한다.      

 

▫️마지막 충동


매티를 떠나보내는 날, 이선은 약속했던 썰매 타기를 마지막으로 함께 해 보기로 한다. 썰매 운전을 잘하는 이선은 ‘치명적인 팔꿈치’를 내미는 커다란 두릅나무를 피해 안정적으로 언덕 아래에 도착하고, 두 사람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옴에 절망한다. 기차를 놓쳐도 갈 곳이 없고, 기차를 시간 맞춰 타도 갈 곳이 없는 매티는 결국 썰매를 타고 나무를 향해 돌진하자는 제안을 한다. 돌아가야 할 집이 갑자기 끔찍한 두려움으로 다가온 이선은 매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질주를 즉흥적으로 실행한다. 하지만 썰매를 몰고 내려가는 이선 앞에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는 본능적으로 썰매를 옆으로 튼다. 잘못된 충돌은 그들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대신, 이후 남은 인생을 둘 다 장애인으로 살게 만든다.


에필로그는 충돌 사건 후 24년을 농장에서 함께 살아온 이선 프롬 부부와 매티의 현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이 없고 표정이 없어진 이선을 사이에 두고 지나와 매티는 처지가 바뀌었다. 중증 불구가 된 매티를 지나가 돌보고 있고, 매티는 심술궂고 불평 많던 예전 지나의 모습이 되어 있다. ‘농장에 사는 프롬네 사람들이나 무덤 아래 있는 프롬네 사람들이나 이렇다 할 차이를 모르겠어요’라고 이웃인 헤일 부인이 말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떠나지 못하는 자


‘무덤 아래 있는 프롬네 사람들’이라는 말은, 가문의 묘지에 묻힌 이선 프롬의 조상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스탁필드에서 나고 자라고 오십 년을 부인과 함께 살다가 죽어서 가족 묘지에 묻힌 동명의 조상 이선 프롬의 지루한 삶을 반복할 것이 두려웠던 청년 이선 프롬. 결국 그는 불길한 예감대로 조상의 삶을 반복하며 살게 되었다. 도시에서의 다른 삶을 살 수도 없었고 대화도 통하지 않고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는 결혼 생활을 끝내지도 못했다. 천생연분과 사람의 도피도 할 수 없었고,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할 용기도 없었다. 이제 그는 ‘몇십 년에 걸친 겨울 추위를 몸 안에 축적한 듯한’ 모습으로 남은 삶을 쓸쓸히 살다가 그의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이선은 묘석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지난 몇 해동 안 이 말 없는 선조들은 그의 조바심, 변화와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욕망을 빈정대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결코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묘석마다 쓰여 있는 듯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다가 마침내 저들에게로 가겠지.’ 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p. 50)     


이선 프롬은 스탁필드를 떠나고 싶어 했고, 떠날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의지대로 실행하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외부의 힘에 그의 내면 동기가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정에 충실하지도 않았던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포기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떠날 기회가 찾아왔지만 병든 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어 떠나지 못했다. 또한 아내와 새로운 곳으로 떠나 살고 싶었지만, 아내는 병들고 농장은 팔리지 않았다. 매티와의 사랑의 도피를 꿈꾸면서도 낯선 곳에서 새롭게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동안 그녀가 겪을 고생을 그리며 미리 마음 아파하고, 자신이 떠나고 홀로 남겨질 아내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이선 프롬은 환경의 힘에 굴복하는 유약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불행은 그 때문이었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착각


비극의 두 번째 이유는, 이선이 홉스가 말한 ‘마지막 충동’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썰매 타기 장면이 그 예다. 애초에 이선은 매티와 함께 죽을 마음이 없었다. 새로 찾아온 사랑을 아쉽지만 잘 정리하여 떠나보내고 연민으로 아내를 계속 돌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매티의 즉흥적인 제안에 쉽게 동의하고야 말았다. 평생 후회할 일이 될 줄 모른 채 말이다. 다시 썰매를 몰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선은 같은 결정을 내릴까.


『생각한다는 착각』의 저자 닉 채터는 우리가 뭔가 깊이 생각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며, 생각이란 그저 떠올리는 순간 실재할 뿐인 신기루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하는 행동들은 우리 생각의 결과물이 아니라,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시작 버튼이다. 행동을 설명하려고 나오는 게 생각이라는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예로 들며 채터는 생각의 실체를 설명한다. 모스크바 변두리의 한 기차역에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진 안나 카레니나. 채터는 브론스키를 잃게 되리라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안나가 몸을 날렸다는 것은 사후 해석에 불과하며, 실제로 안나가 살아 돌아온다면 별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동반 자살을 선택한 이선의 결정도 그 순간의 단순한 변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제안에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충돌 직전에 또 한 번 충동적으로 썰매의 방향을 돌린 행동은 ‘마지막 충동’에 몸을 맡긴 결과이지, 그가 의지를 갖고 결정한 일은 아니다.


이선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우리 인간의 의지란 유약하기 이를 데 없다. 유전적 기질과 환경이라는 외부의 힘, 그리고 알 수 없는 충동 때문에 꺾이고 좌절되며 때론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과연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실체를 갖고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채터의 주장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환상에 불과할까.


출간 된 지 백여 년이 지난 소설 『이선 프롬』은 ‘당신은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믿는가요?’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선처럼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떠났지만 떠나지 않아야 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그리고 또 윤리와 인습, 양심의 가책이라는 벽에 갇혀 엉거주춤 사는 누군가에게.


이디스 워튼 『이선 프롬』(1911),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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