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인가요(3) : 허먼 멜빌『필경사 바틀비』(1853)
허먼 멜빌이 1853년에 익명으로 발표한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문서들을 베껴 쓰는 필경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한 인물의 비극적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화자는, 과거에 만났던 필경사 중에서 가장 이상했던 인물인 바틀비에 대한 기억을 회고담으로 풀어나간다.
법원의 주사가 되면서 일감이 늘어난 화자는 이미 고용하고 있던 두 명의 필경사 외에 한 명의 필경사를 더 고용하게 되는데 그가 바틀비였다. 이틀 동안 엄청난 양의 필사를 해내며 성실성을 보이던 바틀비가 이상 징후를 보인 것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화자가 지시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사한 서류들을 검토하는 일은 물론, 우편물을 가져오는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대답만 하는 바틀비. 그가 집 없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화자는 마침내 해고 카드를 꺼내 들지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바틀비의 막무가내식 답변만 듣게 된다.
참다못한 화자는 사무실을 이전해버리기로 하고 바틀비를 남겨 둔 채 떠나버린다. 사무실 앞 복도에서 노숙 생활을 하는 그는 새 건물주에게도 짐이 되고 마침내 부랑자 수용소에 강제 수용된다. 그곳에서도 ‘식사를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바틀비는 결국 아사한다. 몇 개월 뒤 화자는 바틀비의 이전 직업이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 직원이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배달 불능 편지(dead letter) 같은 모습으로 죽어버린 바틀비를 생각하며 화자는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고 외친다.
이 소설의 부제는 ‘월 가 이야기’이다. 월 스트리트는 지금도 그렇지만 소설이 출간된 19세기 중반에도 자본가들이 모여들던 투자와 금융의 중심이었다. 증권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에 이런 부제를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의 화자가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일하는 곳이 월 스트리트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소설의 부제와 내용이 갖는 공통분모가 ‘돈’이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라는 여덟 블록의 거리는 돈이 만들어 낸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이 소설의 화자도 자신을 인간애가 깊은 사람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고용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그들의 효용가치에 대한 셈에서 시작한다. 돈이 전경에 놓이고 인간은 후경으로 밀려나는 물질 중심 사회의 비정한 풍경. ‘월 가 이야기’라는 부제는 자본주의 풍경화의 제목이다.
자신이 고용한 필경사들을 향한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우선 그는 고용자들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편의대로 별명을 지어 부른다. 칠면조처럼 붉은 얼굴의 필경사는 ‘터키’, 신경질이 많은 다른 한 명은 ‘니퍼즈’다. 터키는 오전에는 일을 빠르게 처리하지만, 오후만 되면 일 처리가 산만해지고, 니퍼즈는 짜증은 많지만, 오후로 갈수록 일 처리가 빨라진다. 이 둘의 상호보완성 때문에 화자는 이들을 계속 고용하고 있다.
필경사는 아니지만, 사무실에는 심부름꾼인 ‘진저 넛’도 있다. 필경사들에게 제공할 생강이 든 빵을 사 오는 일을 주로 맡아서 붙은 별명이다. 진저 넛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아버지가 사정사정하여 사환으로 들여보낸 열두 살 소년이지만, 화자에게 이 아이의 꿈이나 가족의 염원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일 처리를 위해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부품에 불과하다. 일이 제때제때 차질 없이 진행되어 손실을 보지 않는 것, 그것만이 화자의 관심이다.
‘쓸모’를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화자의 사무실은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 안에서 한 인간의 고유한 가치, 꿈, 행복은 도외시되고, 이익 창출에 이바지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 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자본주의 생리에 따른 냉정한 분류다. 현대 사회에서 차별적으로 지급되는 성과 급여만 봐도 그렇다. 지급되는 돈이 바로 그 사람의 등급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원하는 고용주와 그런 성과를 내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는 직원들.
부제로 쓰고 있는 ‘월(wall)’은 이러한 성과 중심 자본주의 사회의 폐쇄성을 나타낸다. 소설에서 ‘벽’이 등장하는 곳은 두 군데다. 첫 번째 장소는 화자의 사무실이다. 벽은 안팎에 다 존재한다. 사무실 밖으로 보이는 ‘거무칙칙한 높다란 벽돌벽’과 사무실 안 사람들을 갈라놓는 칸막이들이다. 눈을 돌리면 바깥의 벽이 보이고 실내에서도 서로를 갈라놓는 벽에 둘러싸인 필경사들은 필사라는 무미건조한 반복 행위를 끊임없이 견딘다. 화자가 인간적 단점으로 여기는 터키의 산만함과 니퍼즈의 짜증은 인간 복사기로 살아가는 기계적 인간에게 생긴 직업병인지도 모른다.
벽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장소는 ‘툼즈(Tombs) 수용소’다. 바틀비가 갇혀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곳의 이름이 ‘무덤’이라니. ‘엄청나게 두꺼운 벽들’로 둘러싸여 있는 수용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묶고 영혼을 고갈시킨다는 점에서 필경사들이 일하는 사무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러므로 ‘월 가 이야기’라는 부제는 자본주의라는 차가운 벽에 둘러싸여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말처럼 부려지는 일꾼들이 받을 귀리는 자기 손에 있다는 주인의식을 가진 화자에게, 바틀비의 등장은 당혹감을 준다. 모든 지시와 요구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로 번역되어 있음)’라는 바틀비의 말은 일꾼들의 사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I would not prefer to)’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대신에, ‘안 하는 것을 긍정’하는 바틀비의 새로운 화법을 다른 필경사들도 따라 하기 시작하자, 화자는 위협을 느낀다. 그가 이루어 놓은 기계적 시스템을 와해시킬 잠재성을 가진 위험 화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자신조차도 무심결에 바틀비의 말투를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이제 바틀비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사무실을 옮기면서 바틀비를 데려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최근에 나는 이 ‘싶다’라는 단어를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도 무심결에 사용하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바틀비와 접촉함으로써 내가 정신적인 면에서 이미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몸이 떨렸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어떤 이상증세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p. 77)
그런데 화자의 불안과는 달리 정작 바틀비는 그런 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강요된 일을 거부할 뿐, 살아 있는 유령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다. 젊은 청년인데도 청년다운 활기와 열정은 찾아볼 수 없다. ‘말없이,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일하던 그가 어느 순간 ‘하지 않음’을 선택하고 화자에 의해 버려지지만 갈 곳이 없다. 자유롭게 되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의 영혼은 자본주의 명령어에 길들어 있었다. 서서히 ‘대서양 한가운데의 난파선’처럼 침몰해가며 결국 노숙인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바틀비는 ‘벽의 아랫부분에 묘하게 움츠린 자세로 있는 소진된 모습’이다.
화자에게 바틀비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위험한 타자였겠지만, 자본주의가 흡수해버린 바틀비의 맥박은 다시 뛸 건강함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는 바틀비를 탈진해 가는 인간으로 보았다. 필사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을 하면서 바틀비의 영혼은 과열로 타버렸고 그로 인해 ‘소진 증후군’을 앓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을 위해 다시 일어설 기력이 없을 정도로 번아웃된 인간, 바틀비. 그에게 있어서 자유의지의 표명이란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소극적 표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바틀비의 가장 큰 비극은 그의 이른 죽음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식사를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라는 말이 그를 죽인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자본주의의 명령어를 부정하던 화법이 습관이 되어 나온 말에 불과했다. 그는 이다음에 이어질 자기표현의 말을 갖지 못했다.
무용지물이 된 바틀비를 거리로 내몬 화자는, 행여 자신에게 튈 책임 분량이 한 조각이라도 있을까 봐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까지 끌어들인다. 바틀비가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 (Dead Letter Office)에서 일한 것이 그의 우울과 무기력함의 원인이며, 이것 때문에 결국 그는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배당 불능 편지라니! 죽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천성적으로 혹은 불운에 의해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이 배달 불능 편지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분류해서 태우는 것보다 그 창백한 절망을 깊게 하는 데 더 안성맞춤인 일이 있을까? (p. 101)
자신이 고용했던 한 노동자의 무기력한 죽음에 대해 자기변호에만 급급한 화자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얼굴을 본다. 기계적 삶을 강요하며 극한의 삶으로 노동자들을 내몰고도, 비인간적이라는 비난과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롭고 싶은 이중성의 얼굴. 그가 잊은 것은 바틀비도 내면에 자유의지를 품고 있는 하나의 찬란한 우주라는 사실이다. 우주 하나를 사라지게 했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냉혹한 시스템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허먼 멜빌『필경사 바틀비』(1853), (한기욱 옮김, 창비,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