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3): 레이 브래드버리『화씨 451』
시카고에 있는 <작가 박물관(Writers Museum)>을 올해(2022년) 여름에 다녀왔다. 2017년에 개관한 이곳은 시카고 중심가에 있지만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지 방문객 수가 매우 적다. 내가 방문한 날도 다섯 명이 채 되는 사람들이 ‘작가의 홀’에 서 있었다. ‘작가의 홀’은 식민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하는 긴 회랑이다. 마치 병풍이 길게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곳을 누군가는 그저 스쳐 지나갔고, 누군가는 이름마저 처음 들어보는 식민지 시절 작가 앞에서 긴 소개 글을 읽고 있었다.
너새니얼 호손, 에밀리 디킨슨, 에드거 앨런 포,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앞에 서서 그들의 초상화나 사진을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어두운 조명들 사이에서 유독 빛났던 작가들의 얼굴이 만들어낸 마법이었을까. 미국 문학사에서 각기 다른 시공간을 살다 간 이들의 작품을 21세기를 사는 내가 읽고 있다는 것이 초현실적 기적인 것만 같은 기분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작가는 가고 없지만, 작품은 남아 매번 다른 독자를 만나 다른 대화를 나누다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고 죽음을 이기는 마술과도 같은 일이다.
회랑을 빠져나오니 흥미로운 공간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가 글을 쓰던 공간을 재현해 낸 ‘작가의 방(A Writer’s Room)’이었다. 매번 다른 작가를 선정해서 일정 기간 공개하는 프로젝트인데, 그날의 주인공은 ‘레이 브래드버리’였다. 그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홀’에서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와 작품들을 막 만나고 왔는데, 그 책들을 다 불태우는 상상을 글로 쓴 작가의 방이라니.
브래드버리의 작업실에 있었다는 책상 위에는, 그가 글을 쓸 때 썼다는 ‘로열 KMM’ 모형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옆에는 ‘레이처럼 써 봐(Write like Ray)’라는 독려문과 함께 타자 용지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문자들이 작가처럼 앉아서 작가의 타자기로 직접 타이핑을 해 보는 체험 공간이었다. 용기를 내어 앉아서 ‘Ray Bradbury Inextinguishable’이라고 타각 타각 타이핑해 보았다. 앉은자리에서 눈에 들어온 그날 작가의 방 타이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정말 재기 넘치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화할 수 없는(꺼지지 않는) 레이 브래드버리’. 오늘날까지도 읽히는 브래드버리 작품의 불멸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작『화씨 451』을 연상시키는 은유이기 때문이다.
『화씨 451』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불태우는 미래의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린 소설이다. ‘1990년 이후에만도 두 번의 핵전쟁’이 있었다는 문장으로 추측해 보면, 브래드버리가 이 소설을 썼던 1950년대로 봐서는 다소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우리로서는 이미 지나온 과거이거나 현재, 혹은 아주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일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간적 배경을 떠나서 은유적으로 읽기 시작하면 소설의 현재성은 더 두드러진다.
주인공 몬태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방화서’에 근무한다. 1790년에 영국의 영향을 받은 불온 책자들을 미국 땅에서 완전히 소각하기 위해 세워진 방화서의 주 임무는 책을 불태우는 일이다. 불법 소유물인 책에 분사기로 등유를 뿌리고 점화하는 일을 수행하는 몬태그의 헬멧에는 45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화씨 451’. 책이 불타는 온도다.
방화서장 ‘비티’는 책은 ‘허황한 의미들과 빗나간 약속들과 공허한 개념들과 쓸데없는 철학’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때 책을 사랑했지만, 부모의 죽음, 핵전쟁과 만연한 질병의 위험 속에서 책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책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소설에는 비티 서장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책이란 ‘하얀 어릿광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몬태그의 아내 ‘밀드레드’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티와 그녀의 차이는, 비티는 책을 읽은 책 혐오자이고, 밀드레드는 책을 읽지 않은 책 혐오자라는 점이다. 책을 읽지 않고 혐오할 수 있는 것은 당국의 정책 때문이다. 책을 가진 집을 전염병의 근원지처럼 낙인찍어 불태워 버리고, 당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로봇 사냥개를 이용해 처단한다. 책이란 위험하고 책 소유는 생존을 위협한다는 생각이 공포의 감정과 함께 학습된다.
그런데도 밀드레드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느낀다). 그녀가 ‘친척’이라고 부르는 TV 피플 때문이다. 수면제를 먹고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밀드레드는 종일 텔레비전을 본다. 3면의 벽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들이 그녀의 깨어 있는 시간을 지배한다. TV는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소마’이며, 영화 <매트릭스>의 파란색 알약이다. 인간으로부터 ‘왜?’라는 질문을 빼앗고 사고 마비 상태의 기계적 행복감을 선사한다. 가장 큰 해악은 밀드레드가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몬태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는 사람이다. 소설의 첫 문장,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에서 알 수 있듯이 몬태그는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신비로운 이웃 소녀 클라리세에게서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밀드레드와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본다. 대화가 없고 아파도 서로에게 관심 없는 두 사람. 그들 사이를 TV가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에 TV를 없애려고 해 보지만 밀드레드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힌다.
그러던 중 블레이크 부인의 집에 책이 있다는 밀고를 접하고 출동하게 된 몬태그와 동료들. 방화작업을 마친 몬태그에게 깊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책을 불태우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책과 운명을 함께 한 블레이크 부인 때문이다. 책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길래 목숨을 버릴 생각까지 한단 말인가. 밀드레드에게 ‘늙은 여자 한 명을 책과 함께 태워 버렸어’라고 말을 꺼내지만, 밀드레드는 ‘난 어제저녁에 참 재미있었어요’라며 TV 이야기를 할 뿐이다.
결국 몬태그는 집 안 환기통 안에 숨겨놓은 책들을 꺼내 읽기 시작하고, 하루에 두 시간씩만, 이 책들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후 몬태그의 행보는 파격적이다. 공원에서 만난 적 있는 파버 교수를 찾아가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몰래 나누고, 도시 너머 저쪽 어딘가에 책을 사수하려는 사람들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 나선다. 배신자를 로봇 사냥개들이 쫓지만, 몬태그는 살아남아 책 사수대에 합류한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책이 필요해질 때를 대비해서 각자의 기억 속에 책 한 권씩 입력한 사람들이 도시 건너편에서 원자 폭탄이 도시를 불태우는 모습을 본다. 따뜻한 온기를 선사하는 ‘정오’가 오기를 기다리는 책 사수대의 모습과 함께 소설은 끝이 난다.
『화씨 451』에서 중요한 이미지는 ‘방화’다. 소설에서 인간은 무자비하게 방화를 실행한다. 등유를 분사해서 책을 불태우고, 생각 없이 원자 폭탄을 터뜨려 도시를 불태운다. 등유는 인간의 사유 능력을 앗아가고 물음표를 인간의 머리에서 떼어 낸다. 원자 폭탄은 인간이 애써 쌓아 올린 물리적 환경을 순식간에 제로 그라운드로 만든다. ‘이 세상은 다양한 형태의 방화범들로 가득 차 있다’라는 브래드버리의 말처럼, 생각 없는 인간들이 함부로 저지르는 방화 때문에 아마 세상은 불가역적 멸망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이런 세상은 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도서관과 서점이 건재하고, 히로시마 이후 원자 폭탄은 터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그럴까. 핵 단추를 가진 지도자 중 한 명이라도 엉뚱한 망상 속에 빠지게 되면 세상은 쉽게 끝난다.
책의 종말은 또 어떤가. 브래드버리의 말처럼 책에 대한 방화는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말초용이나 말장난에 그치는 책들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라는 요약본 책들로 인해, 과도한 검열로 원본을 훼손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읽는 대신 고속도로로 무조건 달려 나가는 ‘가솔린 방랑자들’에 의해.
브래드버리가 그린 두 종류의 방화는 결국 연결되어 있다. 밀드레드 같이 책을 읽지 않고 자극적인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위험해진다. 핵 단추를 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무사유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혁해 가려면, 읽고, 사고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왜?’라고 자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건강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책이 사라진 디스토피아 세상을 가끔 상상하긴 했지만, 책의 소멸이 이미 진행형 시제 속에 들어가 있다는 우울한 생각은 이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해 본다. 책 방화수에서 책 사수자로 변신한 몬태그가 주변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말을 옮겨 본다.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쪽 한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정리하기 위해 아마 일생을 바치다시피 한 사람도 있을 거야.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온갖 사람들을 만나 보면서 이룩해 낸 업적을 나는 단지 일이 분만에 재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p. 89)
레이 브래드버리『화씨 451』(1953), (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