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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우리가 살고 있는 북호텔

소설은 왜 읽나요(2 ) : 외젠 다비『북호텔』(1929)

우리가 살고 있는 북호텔


▫️에드워드 호퍼와 외젠 다비


민음사가 펴낸 외젠 다비의 『북호텔』 표지 그림, 에드워드 호퍼의 <철길 옆 호텔>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림 속 호텔 방 안에 두 남녀가 있다. 방은 빛에 의해 분할되어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느낌을 준다. 남녀의 모습은 기이하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마네킹 같은 느낌을 주는 두 사람은 소통이 없다. 여자는 마치 혼자 방 안에 있는 듯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고, 경직되고 꼿꼿하게 서 있는 남자는 빛이 들어오는 창을 향해 서 있지만 딱히 창밖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지도 않다. 외부의 영향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영향도 받지 않는 짧은 고립의 순간에 놓인 두 사람.


이들이 있는 호텔 방이라는 공간이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다. 이곳은 사실적인 공간이 맞는 걸까. 인류 역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이 필수적으로 거쳐 가야 했던 실존의 불안과 고독을 품은 방은 아닐까. 나도 가 보고 당신도 가 본 그 방. 같이 있지만 같이 있지 않았던 그 방.


이십 세기 초중반 뉴욕시의 주유소, 호텔, 식당, 사무실, 텅 빈 거리 등 친숙하고 일상적인 공간을 그려낸 호퍼는 사실적인 화풍에도 불구하고 상징주의자, 초현실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화가였다. 익숙한 공간 속 인물들의 무표정과 부자연스러움, 멈춰 있는 듯한 이미지가 낯설고 생소한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낯익음 속의 낯섦. 데자뷔와 반대되는 ‘자메뷔’ 효과다. 자메뷔는 익숙함의 재해석을 위한 공백을 만들고, 우리는 그 공백 안에서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새롭게 만나고 시공을 초월하는 이동성을 경험한다.


그림 속 공간 너머의 공간을 보게 하는 힘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갖고 있다면, 시공간적 배경 너머의 시공간으로 독자를 이끌고 가는 힘을 가진 소설이 외젠 다비의 『북호텔』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파리 빈민가 호텔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느닷없이 우리 삶의 비루함과 권태로움, 욕망과 좌절, 고독과 소외를 만난다. 무표정한 호퍼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는 외젠 다비의 덤덤하고 건조한 서술 때문이다.


이제 호퍼의 화집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듯, 사실적 상징주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북호텔』의 이야기들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 보자.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


1차 세계대전 직후 경제적 위기를 겪던 프랑스 파리의 한 빈민가에 ‘북호텔(Hotel Du Nord)’이 있다. ‘우리는 여태껏 지나칠 만큼 경멸을 당해 왔다’라는 르쿠브뢰르 부부가 셋방살이의 설움을 청산하고 인수한 파리 북부의 호텔이다.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공장 직공들, 마부들, 쓰레기 수거원, 가정부 등이 장기 투숙하고 있는 사회 하층민들의 허름한 주거 공간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다 변할 거야’라는 희망을 품고 살지만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질 게 없는 운명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낡고 비위생적인 곳. 그곳이 ‘북호텔’이다.   


르쿠브뢰르 부부가 호텔 관리를 하며 운영하는 1층 카페를 포함해서 총 4층 건물인 이곳에는 마흔 개의 방이 있다. 각각의 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아내는 이 소설은 너무 많은 등장인물 때문에 단편들이 모인 소설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투숙객들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모두 어디선가 들은 듯하고 본 듯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이다. 르네 르베스크의 이야기를 먼저 들여다보자. 고아인 그녀는 철공장 직공인 피에르와 살림을 차리지만, 화학적 사랑의 감정은 쉽게 끝난다. ‘너를 먹여 살리는 게 지긋지긋하다’라는 피에르의 말에, 르네는 호텔 가정부가 된다. ‘나 일하게 됐어요’라는 말에 시큰둥하게 ‘이제야 겨우’라는 말을 하던 피에르는 결국 임신한 그녀를 버리고 떠나 버린다. 혼자 아이를 낳아 유모에게 맡기고 함께 살날을 꿈꾸며 가정부 일을 계속하던 르네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희망 없는 그녀의 삶은 그녀 주변을 기웃거리는 남자들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호텔이 매춘 장소가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르쿠브뢰르 부인에 의해 쫓겨나는 르네의 모습에서 호퍼의 그림, <호텔방>을 떠올린다. 침대 끝에 한 여자가 걸터 앉아 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열차 시간표 같은 것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다. 좁은 방 한구석에는 곧 어딘가로 떠날듯한 분위기를 전하는 여행용 가방이 놓여 있고, 서랍장 끄트머리에는 모자가 위태롭게 걸려 있다. 검은색 구두는 가야 하지만 갈 곳 없는 여자의 상태를 나타내듯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에드워드 호퍼  <호텔방> (1931)

여행 가방, 구두, 모자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차마 외출복을 입지 못하고 물끄러미 열차 시간표만 내려다보는 그림 속 여자. 그 여자를 닮은 르네. 그녀는 삶에 대해 절망하며 호텔을 나선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그녀 자신도 독자도 알 길이 없다. 망설이다가 그저 달리는 차들 뒤를 따라간다는 작가의 묘사에는 군더더기의 감정이 없다. 그래서 더 슬프다.


초라하지만 마음 붙여 살던 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르네의 뒷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삶이 쳐놓은 덫에 번번이 걸리고야 마는 불운한 나의 모습을. 또 평범한 삶의 대열에서 튕겨 나와 갈 곳 없어 하는 당신의 모습을.          


르네는 가방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나? 막연히 선개교 위에서 발을 멈추었다. 거룻배들은 시골의 고요함을 곁에 싣고 가듯이 빌레트 쪽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르네는 머리를 돌렸다. 랄크리 거리를 통해 차들이 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르네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가는 그 차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p. 126)     


또 다른 투숙객 샤를르에게서는 실패한 야심가의 모습을 만난다. 시골에서 올라온 그는 라투슈가 부리는 마부 중 한 명을 내쫓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품는다. 돈과 달콤한 말로 라투슈의 마음을 움직여 목적을 달성하지만, 성취에 대한 자만이 지나쳐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다가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방랑자같이 힘에 겨운 듯한, 질질 끌면서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제마프 둑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라는 문장과 함께 샤를르의 모습은 사라진다.


3층에 사는 드보르제 영감은 과거에 파묻혀 현재를 살지 못하고 미래도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 인쇄공으로 일했던 그는 입만 열면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도망간 첫 번째 아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장티푸스로 죽은 두 번째 아내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말한다. 그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에 갇힌 사람이다. 결국 몇 푼 안 되는 돈조차 벌기 힘들어진 드보르제 영감은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고 한 달에 한 번 북호텔 카페에 들러 주인 부부가 무료로 대접하는 빵과 샐러드를 먹는 낙으로 살아간다. 그는 이제야 탄식하며 말한다. ‘당신은 양로원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오라고 누가 지난날 나에게 말이라도 해 주었더라면….’


이들 외에도 소설에는 남편 간병에 지친 여자, 놈팡이에 아내를 빼앗긴 경찰관, 가정부 일을 하는 집에서 값비싼 속옷을 훔쳐 와 자랑하는 아내를 둔 남편이 등장한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손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배우, 남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댄서, 결혼하리라 생각했던 남자에게 버림받는 가정부, 도망가는 사회주의 운동가, 여장하는 남자도 등장한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모두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고 고독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곳


작가는 이들의 불행과 고독에 섣부른 감상과 연민을 보내지 않는다. 분석과 비판도, 정치적 선동도 하지 않는다. 불행한 한 시대를 살다 간 하층민들의 모습을 덤덤하게 묘사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이들의 불행은 시대의 탓인가, 아니면 각자의 인간적 결함, 무지, 유약함 때문인가. 우리 삶의 고단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소설은 벌집처럼 좁은 방에서 각자의 불행을 짊어지고 살던 예순 명의 사람들이 호텔을 떠나면서 끝난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행처럼 갑자기 가죽 공장 터가 되어버린 호텔, 그리고 무심하게 가방을 든 투숙객들. 그들이 정처 없이 떠난 뒤, 한 층 한 층 허물어지는 호텔을 보며 루이자 르쿠브뢰르는 상념에 젖는다.   

   

‘마치 북호텔이 존재치 않았던 것 같군.’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사진 한 장조차.‘ 그녀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창들이 뚫린 4층 회색 건물, 자기 옛집을 애써 다시 생각해 내려고 했다. 그리고 더 먼, 그녀가 알지 못하는 때, 호텔이 단지 뱃사공들의 여인숙이었던 모습까지도. (p. 215)    

루이자가 알지 못하는 그 옛날의 어느 때부터 존재해왔다는 북호텔은 상징적 공간이다. ‘망할 놈의 일’을 하며, 바뀌지 않을 운명을 탓하거나 순응하며, 꿈이 좌절되고 세상에 배신당해도 삶이란 그러려니 하고 살다 간 사람들이 머무르던 곳.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곳.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사실적 공간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듯이, 외젠 다비는 일상을 무심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절제된 문체가 전달하는 삶의 비애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거기 우리가 사는 ‘북호텔’이 있다.      


 외젠 다비『북호텔』(1929),  (원윤수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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