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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늑대는 알 수 없는 양의 공포

생존이 의무라는 생각, 해보셨나요(2) : 줄리언 반스『시대의 소음』

늑대는 알 수 없는 양의 공포


1942년 7월 20일 자『타임스』지의 표지 인물은 소방관 모자를 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였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와 태희가 춤추는 장면의 배경 음악인 ‘왈츠 2번’을 작곡한 바로 그 음악가다. 『타임스』는 소방관 모자를 쓴 음악가 사진을 왜 표지에 실었을까.


레닌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폭격이 시작되었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입대를 자청했지만 나쁜 시력 때문에 거절당했다. 군대 대신 소방대를 택한 그는 지붕에 떨어지는 소이탄을 진화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조국을 위해 소방관 복장을 하고 레닌그라드 음악원 지붕 위에 서 있는 사진이 선전용으로 전 세계에 뿌려졌다.


『타임스』는 이 사진에 ‘소방관 쇼스타코비치: 레닌그라드에 터지는 폭탄들 속에서 승리의 화음을 듣다 (Fireman Shostakovich: Amid bombs burning in Leningrad he heard the chords of victory)’라는 제목을 붙였다. 폭탄 소리와 화음. 이 둘은 정말 공존할 수 있을까. ‘총들이 말할 때 뮤즈는 침묵을 지킨다 (When guns speak, the muses keep silent)’라는 속담이 있다. 펜 대신 소방 노즐을 잡고 있던 쇼스타코비치가 들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스탈린 시대는 볼셰비키 혁명의 이상이 찌들어가던 유혈과 숙청의 시대였고, 예술의 영역에도 피바람이 몰아쳤다. 스탈린 체제가 배격한 것은 ‘형식주의’였다. 예술의 본질은 ‘형식’이며 그 밖의 시대적, 정치적 요구는 외면해야 한다는 형식주의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선과 전혀 맞지 않았다. 스탈린은 예술가들에게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적 가치를 선도해야 한다는 책임을 지웠고, 정치적 선동과 선전의 도구로 그들을 활용했다. ‘소비에트 예술의 기본 창작원칙’을 따르지 않는 예술가는 반체제 인사라는 딱지가 붙은 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각자 생존을 위해 노력했고 예술을 위해 타협했다. 스트라빈스키처럼 망명지를 옮겨 다니며 예술의 변절을 거부한 음악가도 있었고, 혁명 직후 러시아를 탈출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현실과 타협한 프로코피예프도 있었다. 『롤리타』로 유명한 소설가 나보코프는 혁명 직후 일찌감치 유럽으로 망명해 있다가 훗날 미국으로 건너갔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소방관 복장을 한 채 음악원 지붕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상징하듯이, 그는 전쟁터에서는 진화작업을 하고, 피아노 앞에서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곡을 써 내려갔다. 그래서 아직도 그에게는 ‘스탈린의 부역자’라느니, ‘생존 기술자’와 같은 영예롭지 않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는 정말 소비에트 정권의 충직한 하인에 불과했던 음악가였을까.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가 쓴『시대의 소음』은 예술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두어야 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위태로웠던 나날들을 재조명하고, 살아남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다시 들여다본다.      


▫️층계참에서


소설은 ‘층계참에서’라는 제목과 함께 시작한다.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천재적 음악가로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검은 정장을 입고 가방 하나를 들고서 자신이 사는 아파트 승강기 앞 층계참에 서 있다. 모두 잠든 밤에 홀로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한밤에 느닷없이 비밀경찰에 잡혀가는 모습을 아내와 어린 딸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드미트리를 숙청 대상으로 만든 것은 그가 작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었다. 세계적 격찬을 받은 작품이지만 볼쇼이 극장에 직접 관람하러 온 스탈린이 공연 중에 불쾌해하며 나가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스탈린 정권의 입이자 정책강령을 전달하는 메신저였던 <프라우다>의 사설이 다음 날 그 이유를 실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이 아닌 혼돈’을 썼으며, 소비에트 관객의 기대치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예술가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형식주의자’라는 죄목이 그에게 붙었고, 언제 잡혀가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그는 매일 밤 시달렸다. 층계참에 서 있는 드미트리는 그런 위태로운 상태였다.


계단과 계단 사이 잠시 쉬어가는 공간인 ‘층계참’은 내면의 갈등을 나타내는 소설적 장치다. 계속 올라갈지, 방향을 틀어서 내려갈지 층계참에 서서 고민하던 드미트리는 결국 방향 전환을 결정한다. 사실 그는 ‘그들이 내 양손을 자른다 해도 나는 입에 펜을 물고서라도 작곡을 계속할 것이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열흘 밤을 공포에 떨며 서 있던 그는 깨닫는다. ‘피가 난무하는 육식의 땅’에서 입에 펜을 문 작곡가 따위는 없다는 것을.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가 되거나 ‘죽은 작곡가’가 되거나, 선택지는 오로지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을. 부모를 잃은 딸이 사상 재교육을 위해 특별 보육원에 들어가는 두려운 상상을 하면서 그는 결국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양의 공포


지인의 도움으로 운 좋게 체포와 총살을 면한 드미트리는 반성과 충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공포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1937년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에 초연된 교향곡 5번은 소비에트 예술로 당당히 인정받았고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이제 그는 명실상부한 소비에트 대표 음악가가 되었다.      


정권은 그를 체제 선전 도구로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49년 뉴욕에서 열린 문화과학 세계평화회의에 드미트리는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고, 천재적 재능을 혁명 정신 찬양에 바치는 작곡가에게 미국 언론의 질문이 쏟아졌다. ‘소비에트 정부가 매일 늘어놓는 서구 음악에 대한 끔찍한 비난에 동의하십니까?’,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소비에트 콘서트홀에서 금지한 데 개인적으로 동의하십니까?’. 미국은 드미트리의 답변을 통해 예술을 탄압하는 사회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했고, 드미트리는 ‘동의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진짜 소비에트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늙어서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라는 반스의 표현처럼, 평생 비당원 볼셰비키의 삶을 살았던 드미트리는, 나중에는 그렇게도 경멸해왔던 볼셰비키가 되기 위해 입당원서에 서명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표현처럼 비겁해져 갔다.


하지만 이런 그를 단순히 ‘생존 기술자’라고 우리가 깎아내릴 수 있을까. 정권에 목줄이 쥐어진 예술가가 소방관 모자를 쓰고 전쟁터 진화작업을 한다고 해서 ‘총과 뮤즈가 함께 노래한다’라고 쉽게 냉소할 수 있을까.

반스는 ‘늑대는 양의 공포에 대해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잔인한 숙청의 시대를 살았던 한 예술가가 느꼈을 생존의 위협과 죽음의 공포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엇을 위해 타협의 길을 갔는지 짐작만 할 뿐 정말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해서도 안 된다. 누군들 떨지 않겠는가. 거대 권력 앞에 놓인 한 마리 가련한 양이 된다면.     


▫️예술 부역자  


소설이 언급하고 있는 그 곡,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일인 1937년 11월 21일에 발표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라단조 작품 47번’을 들어본다. 그가 살아남지 않았더라면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곡이다. 혁명의 정신을 힘차게 담았다는 찬사 속에 ‘혁명 교향곡’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곡인데, 비 오는 어두컴컴한 저녁에 들어보니 그저 장송곡 같기만 하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 혁명의 정신이 들어 있단 말인지.


음악에는 정답이 없다. 듣는 사람이 그 순간 느끼는 것이 정답이다. 권력도 정답을 강요할 수 없다. 잠시 음악을 묶어 둘 수는 있겠지만, 음악은 나중에라도 스스로 포승줄을 푼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의 이러한 탈이데올로기적 본성을 믿으며 유혈의 시대를 견뎠을 것이다. 당대의 볼셰비키들이 듣고 싶은 대로 그의 음악을 듣는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그의 혁명 교향곡 속에서 또 다른 곡조를 발견해주리라는 사실을 믿으며 말이다.      

권력층이 말을 갖게 하라. 말이 음악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음악은 말로부터 도망간다. 그것이 음악의 목적이며, 음악의 장엄함이다. 그 표현은 또한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이 그의 교향곡에서 자기네가 듣고 싶은 것을 듣게 해주었다. 그들은 종결부의 끽끽거리는 아이러니를, 승리의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승리 그 자체만을, 소비에트 음악, 소비에트 음악학, 스탈린 체제의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을 향한 충성스러운 지지만을 들었다. (p.p. 87~88)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제목에 눈길이 간다. 지금은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시대가 아니다. 광기와 폭력으로 얼룩졌던 소비에트 체제는 무너져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류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성했던 ‘시대의 소음’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소음에 오로지 음악의 힘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던 한 예술가의 생존 투쟁 이야기와 그의 곡들만 살아남았다.


스탈린 부역자라기보다는 ‘예술 부역자’로 불러 주고 싶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긴 생명력으로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맞는 ‘역사의 속삭임’을 들려줄 그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한다. 우리의 현재는 그날그날 생존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사람들이 힘들게 마련해준 시간이다. 시대의 소음을 뚫고 나와 생존하는 음악처럼, 고단하고 힘들어도 오늘치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미래의 시간을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시대의 소음』 (2016), 줄리언 반스 (송은주 옮김, 다산책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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