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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30. 2022

말할 수 있을 때

잘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2) :히가시노 게이고『녹나무의 파수꾼』

말할 수 있을 때 


SF 소설을 읽으며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사고사와 병사가 없어진 미래의 지구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공평하게 백 년씩의 수명을 받는다. 시간이 흘러 죽음이 찾아왔을 때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미처 전하지 못했던 한마디 말을 지구의 위성, ‘저장성’에 보내는 일이다. 용서를 구하는 말들, 회한이 어린 말들, 사랑을 표현하는 말들, 저주가 섞인 말들이 저장성으로 날아들고, 별은 말들을 흡수하며 빠르게 팽창해 나간다. 마침내 저장성이 말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날이 온다. 긴급 대책회의가 열린다. 말 중 일부를 우주 공간으로 배출하자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무슨 말부터 내보낼지 의견이 분분하다. ‘클린 저장성’을 위해 저주와 원망의 말을 먼저 내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쓰레기로 넘쳐나는 우주에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말들을 나눠주어서 ‘클린 유니버스’를 만들자는 의견도 나온다. 말들의 무게를 달아 가장 무거운 말부터 내보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거운 말은 무엇이고 가장 가벼운 말은 무엇일까? 


허황한 상상 속에서 말의 무게는 어디에서 나올까를 생각해본다. 평생 내뱉은 말의 부피와 무게는 비례하지 않을 것이다. 쉼 없이 속살댔지만, 상대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가볍게 공중분해 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단 한마디의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금과옥조로 남아 일생의 교훈이 되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녹나무의 파수꾼』은 무게 있는 말, 힘을 가진 말은 어떤 말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말 한마디의 힘으로 삶을 긍정하고,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고, 세상과의 경직된 관계도 풀어나가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말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어차피 불량품이라는 말


월향 신사에 예사롭지 않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땅바닥으로 힘차게 뻗어나간 뿌리줄기 위로 큰 뱀 모양의 가지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하늘로 치솟아 있는 거대 녹나무다. 크기도 압도적이지만 이 나무에는 다른 나무에는 없는 특별함이 있다. ‘예념’과 ‘수념’의 능력이다. ‘예념’은 말과 생각을 저장하는 능력이고, ‘수념’은 저장한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이다. 직접 말로 전달하지 못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예념자가 나무에 남겨두면, 훗날 수념자가 와서 그가 남긴 생각이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나중에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들어 있는 속마음 저장소. 이 신비한 나무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녹나무를 관리하고 방문객들에게 밀초를 제공하는 파수꾼의 이름은 레이토다. 그는 남이 보아도 자신이 보기에도 ‘루저’다. 클럽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엄마와 유부남의 불륜으로 태어난 그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잃었고 생활고로 지쳐있던 엄마는 병으로 잃었다. 함께 살지만 각자 외로웠던 레이토와 엄마.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밤늦게 들어온 엄마가 허기져 끓여 먹으면서 조금씩 나눠준 컵 야키소바에 대한 기억이 전부였다.


사회생활은 가정생활만큼 불행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여러 회사를 전전하지만 해고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고한 회사를 대상으로 저지른 기물파손, 절도미수 등의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레이토가 해고된 이유는 회사의 기계를 사 간 고객에게 결함을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었고, 그를 해고한 사장은 레이토를 수리가 도저히 안 되는 ‘결함 많은 기계’라고 불렀다. 가정도, 사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던 레이토는 세상과의 불화가 깊었고, 삶에 대한 의욕도 사람에 대한 신뢰도 다 잃은 상태였다. ‘불량품’으로 분류된 그는 그저 그런 채로 살아갈 터였다.     


▫️다른 가능성의 말


이런 레이토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말을 해주는 사람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유치장으로 찾아온 변호사 이와모토였다. 그는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피해자인 회사 사장과 협상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는데 그 조건이 바로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레이토에게 이런 제안을 한 사람은 엄마의 배다른 자매로서 그로서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이모, 치후네였다. 녹나무를 대대로 관리해오던 호텔 재벌 가문의 딸인 그녀가 어떤 이유로 레이토를 차기 관리인으로 지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치장에서 나갈 수 있는 뜻밖의 기회 앞에서 그는 한참을 망설인다. 


결국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는 레이토를 보며 이와모토는 두 가지를 말한다. 어차피 교도소에나 들어갈 놈이라고 예단하는 사장이 잘못되었음을 살아가면서 증명하라는 말과, 중요한 일에 대한 선택은 직접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지, 동전 따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세상에 불량품으로 태어나 결함투성이 삶을 살아온 레이토의 마음에 처음으로 긍정의 씨앗이 뿌려진다.   

   

레이토는 가슴에 가벼운 통증이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인가 호흡을 거듭한 뒤 가까스로 “기억해두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p. 29)     


세상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말은 ‘너는 그 낙인을 벗어 던질 수 있어’가 아닐까. 누구도 그 말 한 번 해주지 않는 잔인한 세상을 살던 레이토에게 처음으로 다른 가능성의 말이 선물처럼 온 순간이었다. 레이토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영혼을 구제하는 말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는 레이토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진심 어린 말이 갖는 힘을 깨닫게 된 일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그는 마음을 다해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도 남에게 그런 말을 할 줄 몰랐고 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에게 말이란 자신을 적대시하는 세상과 싸우는 유일한 무기였고 그 날카로운 끝이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을 도로 겨누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녹나무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난생처음으로 알아가게 된다. 진심이 담긴 말은 한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는 큰일을 해 낸다는 사실을. 


레이토가 만난 녹나무 방문객 중에 사지 도시아키가 있다. 4년 전 세상을 뜬 형이 생전에 넣어 둔 생각을 읽기 위해 그는 정기적으로 녹나무를 방문한다. 음악천재였던 형은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음악도 삶도 엉망이 되면서 결국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었다. 형 때문에 사랑도 많이 받지 못했고, 자신의 꿈은 접고 형 대신 가업을 이어야 했던 도시아키를 괴롭히는 것은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었다. 형에 대한 원망과, 끝까지 형을 용서하지 못하고 보러 가지 않은 자신의 옹졸함에 대한 후회. 그런데 형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을 가졌었는지, 자신의 평범함과 정상적인 생활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수념을 통해 알게 되면서 원망과 후회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와 마침내 화해한다. 녹나무가 전해주는 진심 덕분이었다. 


레이토가 만난 또 다른 방문객 오바 소키는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석 달 전 타계한 화과자 회사 사장과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그는 진짜 사장의 아들인지 의심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롭다. 유언에 따라 정기적으로 녹나무를 방문하지만, 아버지가 저장해 둔 생각을 쉽게 읽지 못한다. 불륜으로 태어난데다 아버지의 핏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갖고 있었는데 수념까지 잘 이루어지지 않자 ‘잘 될 리가 없지. 나 같은 사람한테’라는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친아들이 아닐 거라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끔찍이 자신을 아껴주었던 아버지가 핏줄의 정당성을 내보이고자 수념을 시킨 사실을 알게 되고 수치심과 굴욕감에서 벗어난다. 


과거의 상처와 후회를 치유해주고, 꺼져가는 영혼에도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진심 어린 말의 힘을 알아가는 레이토. 자신을 위로하기에도 벅찼던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담아 위로의 말을 건넨 사람은 치후네였다. 뛰어난 두뇌, 부, 권력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치후네도 마음의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녹나무에 저장해 둔 생각을 우연히 레이토가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치후네는 호텔 운영에 대해 가졌던 이상이 현실과의 타협을 원하는 임원들로 인해 무너지게 된 것을 힘들어하면서, 운영권을 잃어가는 자신을 사회의 폐품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치매를 앓는 자신이 언제라도 생을 정리할 수 있도록 극약도 몰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런 치후네에게 레이토는 말한다.   

   

잊어버렸다는 자각도 없다면 그곳은 절망의 세계 같은 게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예요. 데이터가 차례차례 삭제된다면 새로운 데이터를 자꾸자꾸 입력하면 되잖아요. 내일의 치후네씨는 오늘의 치후네씨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뭐, 그래도 좋잖아요? 나는 받아들입니다. 내일의 치후네씨를 받아들일 거예요. (p. 548)     


걱정하고 위로하는 그의 진심이 통했을까. 치후네의 대답이 큰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 ‘녹나무의 힘은 필요 없어요. 방금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져 오는 게 있다는걸.’ 전하지 못한 말을 기억하고 회한을 풀어주는 녹나무가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은 되겠지만, 더 좋은 것은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전하고 싶은 말을 ‘직접’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치후네의 말처럼 녹나무의 힘은 필요 없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오늘 진심을 담아 전해 보자. 누가 알겠는가. 늦지 않게 잘 전해진 한마디의 말이 죽어서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원망의 매듭을 스르르 풀어주게 될지, 아니면 소중한 하나의 영혼을 구하게 될지. 어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소이 미디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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