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3) : 손원평『아몬드』
좋은 소설은 턱을 만들어 놓는다. 턱을 만난 독자는 매끄러운 읽기를 멈추고,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중간중간 의미 있는 멈춤의 시간을 허락하기. 이것이 턱이 있는 소설의 힘이다. 손원평의 『아몬드』는 바로 그런 힘을 갖고 있다. 주인공인 윤재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서 자주 멈출 것이다. 잘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말하는 걸까.
윤재는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 불능증)’를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났다. 남보다 작은 편도체(생긴 모양 때문에 윤재는 자기 편도체를 ‘아몬드’라고 부른다) 때문에 감정표현이 언어로도 표정으로도 불가능한 병이다. ‘튀지 말아야 해’를 입에 달고 사는 윤재의 엄마는 동네에서 이미 이상한 아이로 불리는 아들을 '정상 범주'로 밀어 넣기 위해 틈날 때마다 감정표현을 학습하게 한다.
복잡한 것까진 몰라도 기본은 꼭 알아야 해. 그렇게만 해도 조금 메말랐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정상 범주에 속할 거야. (p. 38)
소설은 윤재가 사는 세상과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대비해가며 보여준다. 윤재가 사는 세상은 정상 대 비정상의 이항 대립구조 속에서 정상성 규범을 강요하는 세상이다. 다수는 정상, 소수는 비정상을 의미하는 세상에서, 비정상성은 정상성과는 영원히 어울릴 수 없는 ‘타자’다. 감정표현불능증의 소년은 감정표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튀어나온 두더지나 늪지대의 슈렉이 될 수밖에 없다. 튀어나온 두더지는 때려서라도 다시 들어가게 하는 세상을 윤재는 살아가고 있다.
흉내 내기를 통해 정상 범주에 발을 디디려 했던 윤재는, 결국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사건을 계기로 보통 사람들의 세상과 영원히 멀어진다. 그의 생일이기도 했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느 식당 앞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참극. 그 현장에 그와 그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와 엄마가 있었고, 그들이 희생되는 현장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윤재의 모습은 냉혹한 인간성의 징표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는 ‘괴물’로 낙인찍힌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엄마는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있고, 윤재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냉혹한 괴물에 대한 소문은 그를 앞질러 도착해 있다. 정상성을 벗어난 괴물은 늪지대에 살아야지 인간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다. 엄마의 뜻에 따라 사회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왔던 윤재는, 처음으로 혼자 세상을 직시하며 질문을 던진다. 세상이 그를 해석하고 결론 내리는 것에 의문을 품으면서, 세상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일을 스스로 시작한다.
남들과 비슷하다는 건 뭘까. 사람은 다 다른데 누굴 기준으로 잡지? (p. 71)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 75)
비록 엄마의 정답지는 없지만, 윤재는 홀로서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괴물, ‘곤’을 따뜻하게 품는다. 어릴 때 부모의 실수로 혼자가 된 곤은 여러 가정을 전전하며 파양의 아픔까지 겪은 소년원 출신 아이다. 친부를 만나서 윤재가 있는 고등학교로 편입해 오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은 비뚤고 세상이 그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비뚤다. 윤재와 마찬가지로 곤도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지만, 외로움을 표출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윤재와 정반대의 극점에 서 있다. 세상을 향한 그의 적의는 분노와 폭력으로 표출되어 또 다른 약자인 윤재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윤재의 순수함은 오히려 곤에게서 좋은 점을 찾아낸다.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p. 171)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정겨운 말이었을까. ‘곤이는 착한 애니까요…. 그냥, 알아요. 곤이는 좋은 애예요’라고 말하는 윤재. 그는 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의 좋음과 선함을 본다. 윤재의 할머니가 말하던 ‘예쁨의 발견’이다. 공들여 愛를 쓰고 있던 윤재의 할머니에게 뜻을 알기나 하냐고 엄마가 물었을 때 할머니는 ‘예쁨의 발견’이라고 답했다. 사랑이라는 말이 처음 생겼을 때, 그 의미는 '네가 정말 귀하고 예쁘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금 이 시대의 ‘사랑해’라는 말은 너무나 가볍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한 가수는 ‘사랑해요, 여러분’이라고 불특정 다수에게 외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모티콘은 ‘사랑해’를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빠르고 쉽게 상대에게 전달한다. 사랑은 흔하고 진부하고 의미는 희석되어 있다.
편도체 이상으로 사랑과 좋음을 감정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에게서 예쁨을 발견하고 좋은 아이라고 말해주는 윤재의 모습을 통해, 소설은 정상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세상 사람들은 윤재를 비정상으로 솎아내어 배척하지만, 윤재가 보기에는 타인의 비극에 냉담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다.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마음 없이 ‘마음 아프네’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 전쟁터에서 팔다리를 잃어가는 아이들을 TV 뉴스로 보면서도 일상의 소식으로 동요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뉴스다. 화면을 보고 있는 심 박사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244)
표현력을 상실한 윤재의 백지상태 편도체는 오히려 그래서 세상이 제공하는 인식과 표현의 틀에서 자유롭게 벗어난다. 그에게 있어서 타인의 ‘고통’이란, 익숙해져서 무감한 고통도 아니고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 고통도 아니다. 내 고통인 것처럼 함께 아파하는 마음, 그리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뒤따르는 고통이다.
영화 대사로도 유명하지만, 사람들이 가볍게 농담조로 주고받는 ‘친구 아이가’라는 말이 있다. 윤재에게 있어서 이 말은 절대 가볍지 않다. 곤을 찾으러 죽음을 무릅쓰고 조폭의 소굴로 들어가는 그에게 '그런데 왜 네가 걔를 찾으러 가야 해?'라고 도라가 묻자, '그 앤 내 친구니까'라고 윤재는 짤막하게 대답한다. 묵직한 무게로 새롭게 다가오는 '친구'라는 말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SNS상에서 클릭 한 번으로 너무 쉽고 가볍게 친구를 추가하고 있지 않은가.
목숨까지 걸며 친구 곤을 지켜내는 윤재의 모습을 통해, 마음이 있으면 행동이 따라야 함을, 마음 아프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진심으로 마음 아픈 것이 아님을 소설은 보여준다. 자신을 대신하여 칼을 맞은 윤재에게 곤이 보낸 편지에는 화려한 표현이 없다. 하지만 강조어 하나 없이 짧고 단순한 이 세 줄의 무게는 잴 수 없이 무겁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
꾹꾹 눌러 쓴 뭉툭한 글자들이 전달하는 말의 무게를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우리의 아몬드에는 쓸데없이 많은 감정표현들이 태고의 의미를 상실한 채 가볍게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진심’, ‘진짜 진심’, ‘완전 진심’이라는 말들 속에서, 우리의 ‘진심’이 자꾸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까. 윤재의 아몬드처럼 우리의 아몬드도 말들의 의미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소박하고 무딘 말로도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잘 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일 것이다.
손원평『아몬드』(창비, 2018)